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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7. 2019

내가 누구인지 말해줘

정체성 L'identité, 1997, 밀란 쿤데라 저

난 가능성이라는 바다를 꿈꾼다. 주위에 넘쳐흐르는 무수한 선택지가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출몰한다. 오늘만 하더라도 버스에서 딴생각하다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다. 짐짓 주위를 둘러봤지만 도통 어딘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낯선 거리를 배회하다 문득 이 거리에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간이 떠올랐다. 작은 카페와 누추한 골목의 생김새가 눈에 익는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내가 놓친 그와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그는 또 얼마나 긴 우연이라는 대지를 달려왔을까. 이내 도리질 치며 서둘러 약속 장소로 발길을 돌렸다. 다소 쌀쌀해진 날씨에 몸을 부르르 떨며 영문 모를 길을 헤맸다.

Franz Kafka preparing Gregor Samsa and Friend, 1915

외판원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자신이 벌레가 되었음을 발견한다. 카프카는 소설 <변신>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을 발라냈다. 외모의 변이는 한 인간을 지워낸다. 그가 이룬 모든 사회적 성취가 증발한다. 단지 겉모습뿐인데 어쩌면 그게 다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농담. 어떤 이유나 맥락을 찾을 수 없는 자기부정의 현장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지인과 회사 동료,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인정받고자 버둥거렸지만 끝내 실패한다. 타인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증명도 받을 수 없기에 낙담한다. 카프카는 이 소설을 통해 현대사회의 부조리한 존재의 가벼움을 말한다. 타인을 의식하느라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모멸에 빠진다. 내 자기동일성을 증명할 근거 하나 찾지 못해 바둥거린다.


권태와 허무가 무너뜨리는 삶


삶은 무수한 선택으로 구성된다. 선택의 연쇄가 일상을 만들고, 그 윤곽이 모여 패턴을 형성한다. 내가 수없이 쓴 글엔 그 패턴이 묻어 있다. 내 일상은 단조하지만 그럭저럭 살만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혹한 외로움이 날 찾아온다. 늘 혼자서 책을 읽고 글을 쓰지만 때론 음습한 감정을 떨치지 못한다. 반복되는 패턴에 권태를 느끼고, 내가 가까스로 이룬 것이 죄다 허무하게 보인다. 이런 무차별적인 감정 수탈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이럴 땐 오로지 궤도를 일탈하는 일만이 나를 위로할 수 있다. 난 요즘 이름 모를 타인이 가득한 모임에 나간다. 낯선 이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난 뭐가 그리 고팠는지 내밀한 속내를 터놓는다. 무의식적인 인정 욕구일까. 자리가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자기정체감을 홀로 구축할 수 없다는 일종의 무력감이다. 무관심이 유일한 집단적 열정인 이 도시에서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민음사의 밀란 쿤데라 전집 중, <정체성>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의 시작, 장 마르크라는 남자는 노르망디 해변에 있는 연인 샹탈을 찾아 헤맨다. 멀리서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가지만 정작 뒤돌아선 그녀는 샹탈이 아니다. 장 마르크는 혼자 되뇐다. "그녀와 다른 여자들의 차이가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내 그녀가, 내가 늘 품던 그 작은 몸이 타인 앞에선 낯설게 느껴진다. 내 앞에서 손을 괴던 얼굴이 그들 앞에선 전혀 다른 분위기를 머금는다. 그 생경함에 진위를 알 수 없는 이물감이 느껴진다. 뉴스에선 결혼 15년 만에 이혼한 연예인 부부를 인터뷰한다. 내가 아는 그가 아니었어요.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지독하게 날 괴롭혔어요. 한 인간의 절단면엔 얼마나 다른 층위가 있을까. 역할 이론에 따르면 인간 행동을 어떤 내적인 소질, 재능, 욕망 등의 표현으로서가 아니고 집단 속에서 차지하는 포지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느냐에 따라 우린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관계는 서로에게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다른 결을 드러낸다. <정체성>은 각자 다름과 변이가 주는 매혹과 경이로움을 사색하는 작품이다.


가능성을 넓혀가는 선택의 기로


샹탈은 다섯 살 난 아이를 잃고 전 남편과 이혼한다. 그녀는 아이가 죽자마자 다시 임신하기를 촉구하는 시댁에 혐오를 느낀다. 아이를 부정하려는 태도에 두려움을 가진다. 엄연히 존재했던 아이를 쉽게 잊는 사람들. 샹탈은 그 속에 설 자신이 없다. 사실 속내는 좀 더 복잡하다. 그녀에겐 혹독한 슬픔 외에도 아이가 사라짐으로써 얻은 기쁨이 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말로 꺼내기 힘든 환희를 느낀다. 결혼과 아이로 인해 가로막혀 있던 또 다른 가능성이 다시 그녀를 찾아온 셈이다. 그녀는 결혼 전 다녔던 광고회사에 다시 취업한다. 아이가 있었을 땐 세상을 마음 놓고 부정할 수 없었다. 아이가 커 갈 세상에 저주를 퍼부을 만큼 모진 어미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혼 후 샹탈은 오히려 죽은 아이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네 죽음이 슬프지만 지금은 네 덕분에 어떤 거리낌 없이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이 누추한 세상을 욕할 수 있으며, 모든 걸 망쳐버릴걸 알면서도 손쉽게 낙관한다. 그녀는 결코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클로저 Closer, 2004

샹탈은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문득 남자들이 더 이상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들의 무관심에 자신이 말라감을 느낀다. 우주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장미처럼 늙음이라는 건 소멸을 뜻한다. 매끈하던 살이 늘어지고 맑은 침에선 악취가 난다. 누구의 말처럼 노년은 대학살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연인 장 마르크는 안타깝다. 이름도 진부한 ‘시라노’라는 필명으로 그녀에게 연서를 쓴다. 타인을 가장하여 그녀를 속인다. 샹탈은 난데없이 도착한 의문의 편지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미지의 존재에 떨림을 느낀다. 그녀는 편지를 남편 몰래 숨기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진주 목걸이를 차고 거리에 활보한다. 누군가를 의식하며 걷는 그녀의 발걸음이 청량하다. 이를 바라보는 장 마르크의 마음은 착잡하다. 다른 존재가 되지 않고는 그녀에게 매혹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시간은 장 마르크를 모두에게 잊힌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달콤한 속삭임이다. “눈꺼풀이 깜빡일 때 다른 것이 끼어들지 않도록 눈길을 떼지 않겠다.” 내가 느끼는 당신은 내가 만들어낸 허구의 메트로놈이다. 난 항상 똑딱거리는 소리가 사라질까 봐 전전긍긍한다. 당신을 매초 갱신하며 새롭게 바라본다. 지워지고 깨어질까 봐 도통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 결국 다시 뭔가를 적어나갈 수밖에. 나는 당신을 알아보려고 적고 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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