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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7. 2019

틈만 나면 뒷걸음치는 마음

모멸감, 김찬호 저

관계는 늘 갈등을 수반한다. 수년간 사람 사이에서 뒤엉켜 대거리에 시달렸다. 그때마다 절실했던 건 타인과 거리를 벌리려는 마음이다. 여전히 부득요령이나 팔짱을 끼고서 주춤한다. 도무지 적정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한없이 멀리하고 싶은 게 타인인데, 마음 한구석 불안이 삐걱거린다. 그저 매 순간 마음이 상하기 전에 물러서려 한다. 쉽사리 사람을 곁에 두지도 않고, 너무 가까이 오면 능청스럽게 뒷걸음친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주변을 말끔하게 치워야 평온하다. 마음이 동한다고 충동적으로 다가가지도 못한다. 가치 있는 관계를 향한 태도가 달라졌달까. 차가운 관계에도 미덕을 본다. 무모하게 관계에 용을 써봤자 카톡 리스트만 늘어날 뿐이다. 속 깊은 대활 하겠다고 공 들여도 숙취 빼곤 휑하다. 서점에서 팔리는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인간관계란 비상용 복주머니와 다를 바 없다. 언젠가 날 도와줄 거란 막연함에 목을 맨다. 당치도 않게 지인을 관리하려 든다. 인맥이란 참 웃긴 말이다. 지인을 계통이나 계열로 분류해서 적재적소에 쓰려고 목록을 만든다. 나 하나 추스르고 살기도 벅찬데, 하루하루가 관성처럼 숫자만 쌓이는데 누가 누굴 관리한단 말인가. 믿지도 않는 유대를 위해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기엔 시침이 너무 빠르다. 내 세계를 갈고닦기에도 사유는 늘 갈급하다.


그렇다고 관계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 역시 대화에 고프다. 종종 친구와 만나 고기를 굽는 게 행복하다. 일주일만 혼자 다녀도 관계에 궁핍을 느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관계는 늘 애걸복걸하고 다사다난한데 사람을 향한 고민은 곁을 맴돈다.

내가 지향하는 관계란 취향과 생각을 나누는 딱 그 정도다. 적정 거리를 확보한 체 대화를 나눈다. 오래된 친구는 편하지만 과거와 달리 취향은 멀어져 버렸다. 할 말이 없으니 술만 처먹고 pc방에서 죄 없는 뮤턴트를 사냥한다. 오히려 가끔 만나 그때그때 관심사에 따라 그치듯 만나는 사람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눈다. 친목이 진라면도 아니고 돈독한 관계를 향한 선망은 이제 사라졌다. 모든 관계의 가치를 단순화하는 이데올로기에 거부감을 갖는다. 세상엔 다양한 사이가 있고 거기엔 그 나름대로 정다움이 있다. 난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시킬 때처럼 취향으로 맺어진 관계에 끌린다. 관계를 기호에 맞게 취사선택할 수 있을 때 불필요한 모욕은 줄어든다.

 다수 인문서를 쓴 사회학자 김찬호의 <모멸감>은 감정에 대한 보고서다. 한국 사회에서 일하며 누군가와 복닥거릴 때 필연처럼 떠안게 되는 감정을 서술한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 기저에 자리한 모멸을 훑는다. 의식하고 있지만, 말로 정의하지 못한 감정이랄까. 책을 읽고 나면 자기모멸이란 사회가 내재한 기본값임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학자답게 지적 사유가 모멸에서 탈피할 수 있는 열쇠라고 말한다. 성숙한 사회, 부정적 감정을 정화하는 시스템 말이다. 가령 모욕 감수성을 의식하고 사회 공동체를 통해 해소할 수 있는 갈등을 말한다. 김찬호가 가진 근본적 선량함과 과단성은 이 책이 가진 힘이다. 쉬운 문장으로 일상을 곡해하는 부정적 현상을 풀어낸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느낀 감정은 그의 문장처럼 결코 멀끔하지 않았다. 조심하고 사려 해봤자 그뿐이라는 비관이 앞섰다. 오히려 인간 사이 파열음은 어쩔 수 없다는 확신이 고개를 든다. 저자 말대로 소수의 연대를 통해서 헤게모니를 탈피하고자 하는 생각은 그 자체로 옳으나, 아무리 생각을 고쳐먹은들 세상 꼴은 늘 못마땅할 것이다. 내 맘 같은 세상이란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어쩔 수 없이 적절한 타협이 필요하다. 난 이 사회에서 유일한 안식처가 고립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사이 연계를 최소화할 때 비로소 안전하다. 그건 어쩌면 불운한 도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신을 다독이며 부족함을 채워가는 형태일 뿐이다. 고독은 사색과 사유를 선물한다.


난 세상을 회의한다. 세상 꼴은 늘 실망스럽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이란 애당초 없다. 우후죽순 나오는 사회과학서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 특히 인간 사이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맘을 앙상하게 한다. 누군가는 사람 사이에 서서 힘을 받는다는데 난 부대낌에 허공에 고개를 든다. 개인주의가 사회적 가치로 떠올랐지만 그건 트렌드의 눈속임이다. 난 인간 사이에 서면 쓸데없이 피곤해진다. 쓸데없는 술자리에 불려 다니고 상대의 감정을 살피느라 감정을 소모한다. 그런 질척임은 직장만도 벅차다. 이럴 땐 파스칼이 읊조린 말을 떠올린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혼자 조용히 집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6시 퇴근 후까지 고독할 수 없다면 나를 정리할 시간은 대체 어디서 찾을까.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산책할 수 없다면 매일 밤이 기껍지 못할 것이다. 관성으로 말미암아 달력을 넘겨도 숫자 외엔 바뀌지 않는다.

요즘 누군가는 인맥 다이어트에 힘쓴다고 한다. 형식뿐인 지인을 줄여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만 주위에 둔다. 난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인맥은 저축성 예금이다. 실제 필요한 날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원금 보장도 안 되는 상품에 월급을 쏟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보험처럼 불안을 파는 시장에 불과하다. 카뮈는 행복하여지자면 주변 사람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조금 뒤틀어, 행복은 내가 책임지고 감당할 수 있는 관계에 머물 때 찾아온다고 떠벌인다. 사실 연인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바삐 돌아간다. 가족 챙기느라 골치가 아프다. 사회생활이 만들어준 관계를 유지하는 데만도 피로하다. 난 타인과 모욕을 주고받는 걸 방지한다거나, 그걸 딛고 일어서는 묘수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모멸을 피해 달아난다. 지속적이며 끈질기게 인간을 괴롭히는 타자들은 그 자체로 지옥이다. 우후죽순 모욕이 엄습하는 순간을 견디고 또 견뎌야 할 터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난 오로지 한적한 거리를 떠올린다. 관계의 사슬을 걷어내고 이어폰을 꽂으며 홀가분해한다. 각자 조금씩 멀어지고  힘들면 도망쳐야 한다. 세상은 도통 그런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 책임지지 않는 관계들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돈독하고 죽고 못 사는 관계 말고, 그냥 이대로가 좋다고 다독인다. 아늑한 방에서 몸을 추스르며 서로를 마다한다. 그러다 조금 멜랑콜리해지면 다시 커피 한 잔 정도 둘 수 있는 거리면 족하다. 모멸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피해야 하는 저변이니까. 괴테의 말처럼 영감이란 오로지 홀로 얻을 수 있는 귀한 보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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