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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2. 2019

서정시를 쓰기 힘든 순간

피프티 피플, 정세랑 저

종종 권태가 찾아온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선 날 헤집어 놓는다. 지루함인지 무기력인지 단어도 고를 새 없이 어리둥절하다. 그럴 땐 매일 반복하는 일과가 볼품없어 보인다. 마치 쳇바퀴에 놓인 햄스터처럼 영문 모를 허기에 시달린다. 어제도 퇴근길에 늘 가던 카페를 가려다 발길을 돌렸다.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쏘다녔다. 갈 데가 없는데 어디든 닿고 싶었다. 삼각지에서 걷기 시작해 효창공원을 지나 광흥창까지 쉼 없이 걸었다. cosmic boy라는 녀석의 음악을 귀에 꽂고 잡념을 길에 흘리고 다녔다. 밤바람이 차서일까, 감상에 젖기보다는 당혹감이 들었다. 나이 서른을 넘고도 납득 못 하는 감정에 시달리다니. 사춘기도 아니고 별스러운 기분에 난데없는 주먹세례를 당하다니. 세상 다 아는 척 건방을 떨며 글을 써댔는데 이게 뭔 낭팬가.


평소 허무를 겁낸다. 내가 사는 삶, 더 자세히는 내가 두드리는 문장이 무의미로 소멸할까 두렵다. 그래서 차곡차곡 연탄을 쌓듯 독서량을 늘리고 규칙적으로 글을 썼다. 하지만 글은 연금보험처럼 실체가 없더라. 십 년을 넘게 부어도 만기는 멀기만 하다. 시간이 갈수록 번뜩이는 사고는커녕 동어반복으로 매몰한다. 뭔가를 바라고 쓴 게 아닌데도 괜스레 서글프다. 가뜩이나 시간에 쪼들리는데 틈만 나면 노트북을 펴니 인간관계는 날로 좁아진다. 뭔가 그럴싸한 걸 남기고 싶지만, 백지를 채운 문장이 초라하다. 좀 다듬어 보지만 백스페이스가 나한테 닥치라 한다. 타타타타타. 이런 걸 슬럼프라고 하나. 과정 그 자체에 넋을 두지 못하고 온통 콩고물에만 눈이 돌아간다. 애당초 승산 없는 인정 투쟁임을 알면서도 요행을 쫓는다.

권태와 허무는 환절기 감기처럼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친다. 반박할 여지도 없이 궁지로 몬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걷다 몸이 으슬으슬해져 근처 버거킹에 들어갔다. 대충 눈에 보이는 세트를 시키고 책을 꺼냈다.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 중간까지 겨우 읽었는데 통 집중이 안 된다. 주인공이 50명이라 정신이 산란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운 녀석과 마주해야 하다니. 안 그래도 사람에 시달리다 퇴근했는데 이러기냐. 그래도 달리 할 게 없어 꾸역꾸역 읽었다. 그렇게 읽다 보니 계속 책장이 넘어간다. 한 사람 두 사람 안면을 트니 다 괜찮은 녀석들이더라.


50명을 다 통과하고 나서 소감을 적는다. 난 이 짧은 토막들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나. 생경함? 생소함? 문득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uncanny)가 떠올랐다. "인간에게는 많은 것이 내재해 있고 또 인간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인간이 지금 이 상태로 머물러 있으란 법은 없다." 낯설게 한다는 건 거리를 둔다는 말이다. 소설을 읽으며 간혹 삶을 뒤흔드는 골칫덩이를 마주할 때가 있다. 영화를 볼 때도 주인공에 동화되기보다는 현실에 산적한 문제가 비어져 나오곤 한다. 예술을 접할 때 지나친 몰입을 경계하고 거리를 둔다. 그렇다고 즐기지 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거시적 안목은 관점을 확장시킨다. 이런 능동적인 관람 태도는 서사의 격류에 몸을 맡기기보단 디테일에 몰입한다. 감정을 부러 소외시키고 현실과 허구 사이의 파열음에 귀를 기울인다.

정세랑은 제각각 다른 인물들을 멀찍이서 살핀다. 낯익은 일상에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감각을 서술하는 솜씨랄까. 정세랑이 구축한 리얼리티는 내 보잘것없는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저 이 혹독한 세상에서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복닥거리며 산다는 게 어쩐지 감동적이다. <피프티 피플>엔 스스로 안위만 살피느라, 눈앞의 문제만 신경 쓰다 통 둘러보지 못했던 타자들이 그득하다. 별거 없어 보이는 그들 속에도 제각각 하나의 우주가 있음을 실감한다. 모든 게 허구임에도 가짜 같지 않다.

정세랑은 유별날 일 없는 한 명 한 명을 그려 넣으며 인생의 결을 수집했다. 이렇다 할 서사랄 게 없고 뚜렷한 기승전결도 찾기 어렵다. 위기나 반전과 같은 극적 요소도 멀리한다. 현실을 ‘극화’ 하지 않으니 삶과 밀착하다. 관성처럼 흘러가던 일과에 밑줄을 치며 가까스로 의미를 부여한다. 사회문제를 가감 없이 소재로 끌어들이고, 한 번쯤 뉴스에서 들어봤을 법한 화자가 서울의 혹독한 삶을 상기한다. 꼬인 인물이 없어 다소 계몽적으로 느껴지나 그래서 속이 편안하고 뒷맛이 개운하다.


사건이 인과의 사슬에 놓인 전통 소설은 선형적이다. 마치 영웅 서사가 악당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피프티 피플>엔 정의를 회복하고 불의를 무너뜨리는 익숙한 필연이 없다. 오로지 우연에 의지한 플롯으로 짧은 에피소드에 맴돈다. 문득 떠올리는 사소한 감정에 공을 들인다. 삶은 비슷한 모양새로 반복되고, 우리는 스스로를 답습하며 산다. 하루하루 뭐가 바뀌는지도 모른 채 영문 모를 피로에 시달리기도 한다. 소설은 그때마다 제 역할을 하기 위해 책장에 꽂혀있다. 내 앙상한 속내를 알아채곤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시간을 돌려준다.



커버 사진 :  영화 <그 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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