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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4. 2019

대체로 가만한 나날

가만한 나날, 김세희 저

 퇴근길 버스에서 Jtbc 뉴스룸을 본다. 어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런 흥미진진한 일들이 생길까.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현생이 바로 이 도시가 아닐까 상상한다. 얼마 전 본 선배의 작은 아가들이 생각났다. 이런 세계에서 아이들이 온전히 자랄 수 있을까. 맑은 눈으로 섬기듯 바라보는 녀석들에게 세상은 어떤 걸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누웠다. 나이가 드니 운동을 많이 해도 몸이 요지부동이다. 그렇게 낑낑대며 쇠와 씨름을 해서 내가 얻는 건 뭘까. 발버둥 치는 도살장의 소처럼 난 오만상을 쓰고 몸을 뒤척인다. 책은 눈에 안 들어오고 글 쓰는 건 더 요원하다. 멍하니 손석희만 보다가 잠들었다. 누가 그랬던가 행복은 반복에서 나온다고, 겨우 이 정도가 내 행복의 적정량이다. 


 피곤하더라도 최근 읽은 책에 대해 적는다. 뭘 위해 적는 건가. 수십 권의 소설을 쓴 ‘스티븐 킹’에 의하면 글쓰기란 정신 감응이며, 문학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응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감응이라는 건 뭘까. 아마도 독자와 주고받는 상호감응을 말하는 거겠지. 그에 반해 내가 뭔가를 적으며 생각한 감응은 전적으로 혼잣말에 가깝다. 조금씩 늘고 있는 구독자는 수치로만 존재할 뿐 실감이 없다. 그들은 날 읽어줄지 모르지만 난 그들을 볼 수 없으니까. 그저 종일 머릿속을 정처 없이 떠도는 잡념과 망상이 글쓰기를 통해 만져진다. 형체를 알 수 없었던 상상이 문장으로 드러나면 스스로 초라해진다. 그래서 문장 대부분은 망각으로 사라진다. 그래도 가끔 보면 맘에 들 때도 있다. 이 정도면 꽤 근사한 생각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얼른 업로드 버튼을 누른다. 감명 깊게 읽은 소설과 책을 소개하고 싶다는 일말의 선의를 핑계 삼아 올린다. 슬펐다, 좋았다, 지렸다, 오지다 같은 의심스러운 말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문장이 안쓰럽다.


 김세희의 소설 <가만한 나날>은 특이하게도 직업적 블로거가 화자다. 블로그를 통해 특정 상품을 홍보하는 마케팅 회사에서 일한다. 가짜 계정을 만들어 온갖 물품의 사용 후기를 올린다. 마치 진짜 자신이 사용한 듯 그럴싸케 포스팅한다. 화자가 만든 캐릭터는 30대 후반의 ‘채털리 부인’이다. 그녀는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동년배 주부를 현혹한다. 제품을 사용하는 모습을 찍어 상품에 대한 감상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면 구독자는 반응한다. ‘엄지 척’과 ‘좋아요’는 곧 판매량으로 직결한다. 그녀가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제품을 구매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채털리 부인은 거짓으로 꾸민 삶의 양태를 판매하는 셈이다. 


 작가가 되길 희망했지만 여의치 않아 홍보업체 취업한 화자는 블로거가 본인에게 잘 맞는다고 느낀다. 채털리 부인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는 그녀가 포기했단 문학을 향한 갈증을 일깨운다. 마치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일상을 적는 에세이 작가처럼 그녀는 채털리 부인에 몰입한다. 마치 소설을 적듯 있을 법한 이야기를 꾸며 생생한 캐릭터를 구축한다. 문제는 회사 방침에 의해 허위를 바탕으로 한 상업적 게시물임을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못내 찜찜한 마음이 들지만, 그것도 잠시뿐 퇴근과 함께 고민도 끝난다. 먹고사는 데 급급해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어느 날 채털리 부인은 자신이 홍보한 살균제가 치명적인 인명 피해를 유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진다.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비극에 휘말린 화자는 더는 채털리 부인이 되지 못한다. 제 일이 가닿은 여파가 윤리적으로 바닥을 드러내자 파열한다.


 작가는 우리가 늘 겪는 직장에서의 고민, 지하철에서 스치는 일상의 사색을 좇는다. 소설집에 실린 전 작품이 삶과 밀접해 자꾸만 스스로 돌아보게 만든다. 그들 모두 남 같지 않아 마음을 붙잡는 데가 있다. 무엇보다 작가가 구사하는 문장이 가만하기보다는 다단해서 마음이 쓰인다. 시종일관 녹록지 않은 상황에 고민은 더해간다. 손쉽게 결론짓고 웃지 않기에 믿음직스럽다. 포기하고 낙담하기보단 속이 시끄러운 지점을 잠시 건너뛰곤 한 템포 쉬어간다. 어둠이 끼친 여파를 살피고, 폭풍이 지나간 자리를 살핀다. 무엇보다 끝내 놓아버리지 않아 신뢰를 가질 수 있다.


 가끔 글을 쓰다가 내가 적는 문장이 누군가의 인생에 가닿는 상상을 한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그들의 일상을 뒤틀고, 의도치 않게 부정적으로 몰지는 않을까 우려한다. 그건 나를 과대평가하는 거라며 웃어넘기지만, 가끔은 불길한 상상에 젖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 글을 읽는 이름 모를 그들을 상상하길 멈추지 않는다. 아니 더욱더 치열하게 그들을 의식한다.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고 그 마음에 들어가 보려는 상태를 동경하기 때문이다. 내게 그런 상상은 문학이 현현하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기만적 위로가 아닌 자기 삶의 가치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안도다. 어떤 삶을 택하든 나를 살피고 다듬어서 최대한 자족할 수 있기를. 이 삭막하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누군가의 불행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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