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저

by 박민진

#1

아침 출근길에 버스에서 가방을 여니 진동벨이 있었다. 순간 아득해지며 내가 어젯밤에 뭘 했는지 떠올렸다. 난 잘 취하지도 않는데 이게 뭔 일이람. 어젠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았잖아. 그저 한낱 평범한 술자리였고, 그냥 집에 가기 아쉬워 이차로 커피집에서 목을 축였을 뿐인데. 이 미스터리를 주변에 말하지 못했다. 창피함보다는 조금 무서운 마음이 들어서였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다니. 내가 통제하지 못한 시간에 난 뭘 했나. 잃어버린 시간은 내게 어떤 상징처럼 진동벨을 건넸다. 난 사무실에 출근해서도 울릴 리 없는 진동벨을 앞에 두고 커피를 마셨다. 혹여나 누군가가 보내는 신호를 놓칠까 봐 한참을 바라봤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어제 집에 들어온 기억이 없다. 이런 일시적 망각을 혹자는 필름이 끊겼다고 할 테지만, 나는 알코올의 영향 없이 스스로 내 기억을 훼손했다. 주황색 조명이 눈을 찌르는 어느 술집에 앉은 나는 주위 사람들 얘기는 듣지도 않고 먹태를 씹었다. 정확히는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질겅질겅 바싹 짭조름한 노란 먹태를 벗 삼아 풀리지 않는 고민과 씨름했다. 어젯밤 내내 지인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별말도 없는 날 등한시하고 저희끼리 잘 놀더라. 난 정신이 사나워 가끔 얼굴을 찡그리며 먹태를 씹는 되새김질에 속도를 붙였다. 종종 의례적인 말을 했지만, 손에 잡히는 대화는 하지 않았다. 그저 관심도 없는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종종 이럴 때가 있다. 가슴 저미는 불안과 미심쩍은 기분이 연한 커피처럼 내 머리로 스며든다. 거슴츠레한 얼굴로 불길한 상상을 편다. 결론적으로 난 진동벨을 가방에 넣음으로써 스스로 위험신호를 보냈다. 아, 사장님은 어제저녁 얼마나 바빴으면 진동벨 없이 커피를 내주셨을까.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얼마나 찜찜했을까. 자신을 스쳐 간 무수한 고객을 불신하고, 요즘 놈들은 다 글러 먹었다며 욕을 한바탕 했을지도. 애꿎게 죄 없는 알바를 구박하며 기분이 더러워졌을지도. 난 쪽팔려서 직접 돌려드리지 못하고, 사과 쪽지와 함께 택배 상자에 동봉했다. 다행히 진동벨은 끝내 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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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제 집에 들어와 도통 잠이 오지 않아, 김혜리 작가 블로그를 염탐했다. 가끔 익명으로 그녀의 블로그에 이런저런 댓글을 남긴다. 물론 인파가 몰린 그녀의 블로그에서 대답을 듣기란 어렵다. 어떤 의식처럼 매주 댓글을 달지만, 작가님이 답을 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도 종종 화답이 오면 감동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사도신경을 읊는 자세로 댓글을 곱씹어 읽는다. 지난주에도 기자님이 친히 내 댓글에 대댓글을 남겨주셨다. 내가 지하철에서 <씨네21> '영화의 일기' 꼭지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는 내용이었는데, 기자님은 고마움을 표하며 거기에 내 아이디를 추론하는 댓글을 남기셨다. 내 아이디는 성촉절을 의미하는 영어단어(groundhogday)인데, 이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원제이기도 하다. 작가님은 이를 알아보고 내게 의미를 물었다. 이런 세심한 사람, 난 또 감동에 휩싸여 정성스레 내 의미 없는 작명에 관해 설명했다. 난 언어에 민감한 사람을 보면 사랑에 빠진다. 세심하고 기민한 감각을 지닌 이를 보면 막연한 동경이 피어오른다. 너무 무차별적이라 헤어 나올 수 없다. 약도 없는 병이다.


#3

난 섬세함과 민감, 세심 같은 단어를 좋아한다. 나와 정 반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 단어들을 볼 때마다 애틋하다. 하지만 동시에 기가 죽는다. 특히 일류 작가가 가진 민감한 촉, 문장에 새겨진 곡진함을 보면 문득 두렵다. 왠지 눈가가 촉촉한 사람만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저들 세계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하겠구나. 절망과 치기는 도를 넘어 어쩌지 못하고, 멜론 플레이리스트에서 힙한 힙합곡을 따라 부른다. 그래 문학은 개나 줘버려라. 난 세상을 헐뜯고 나만 잘난 힙합을 듣겠다. 일하다가도 자주 세심한 감각과 멀어짐을 느낀다. 쉽고 편하고 싶어 폭력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부지런히 뭔가를 관찰하고 생각에 빠지지만, 그마저도 자꾸 눈이 감겨 요원하다. 하루의 소멸이 목전에 다다르면 조바심이 든다.

그날도(진동벨이 내 곁으로 온 날) 일과 중 일어난 미묘한 갈등에 마음이 쓰여 종일 고민했다. 내가 놓친 그의 입장과 순식간에 치솟은 흥분이 날 쥐구멍으로 몰았다. 내 마음은 어찌나 쥐꼬리인지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벙벙했다. 술자리까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못해 고민에 빠진다. 그래도 침대에 누워 책을 펼치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문학을 참고서 삼아 날 다그친다. 난 가끔 어떤 이가 이해받지 못한다는 건, 사실 이해할 게 너무 많아 외면하면서 생긴 착오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해는 피곤한 일이니까. 이것저것 고려하기 시작하면 쉽게 지친다. 마치 뉴스 헤드라인처럼, 본문은 읽지도 않고 댓글을 다는 네티즌처럼 속단하고 추측한다. 자극에 휘둘리고, 반성하지 않는다. 일류 작가는 문장 속에 고된 이해의 과정을 녹인다. 사건의 스펙터클이 아닌, 사건 이후 스펙트럼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정말 순수문학이라는 게 있다면, 그 '순수' 안에는 사건이 자아내는 파장에 따르는 빛의 성분이 줄줄이 적혀있으리라. 작가는 그 리스트를 분석해 빛을 자아내는 물질의 조성과 구조를 낱낱이 알아낸다. 내 편치 않은 마음을 다독이려고 수고를 마다치 않는다. 그런 막연한 믿음으로 난 이 밤을 붙잡고 소설에 심취한다.

#4

'앤드루 포터'라는 낯선 작가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는 단편집을 좋아한다. 책방 직원이 이 책을 받아 들면 혹시 물리 서적 코너에 넣지는 않을까. 앤드루 포터라는 이름부터 뭔가 공학자의 냄새가 나니까.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 이후 가장 난해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역자 해설을 보니 이 제목은 일련의 물리학 실험에서 따왔다고 한다. 낮에 램프를 켜놓고 보면 빛이 유리창 표면에서 부분적으로 반사된다. 가령 빛의 입자 100개가 있다면 96개는 투과하지만 4개는 부딪혀 돌아온다나. 문제는 어떤 녀석이 투과할지 알 수가 없다는 거다. 이런 단상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수록된 열 개의 이야기에 알맞은 주석이 된다. 한 사람이 하루하루 스치며 마주하는 일은 무수하지만, 남는 건 극히 제한적이다. 내가 이 책을 몇몇 이미지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게 앤드루 포터는 고작 어떤 자취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국 그 정확하거나 중요하지도 않은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느낌에 의지해 삶의 감각을 깨우친다. 작가는 누군가가 스친 별거 아닌 순간을 정밀하게 묘사해서 미묘한 생의 감각을 밝혀낸다. 이건 문학적 경험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감각이다. 내 비루한 언어 조탁 능력으로는 딱 이 정도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찬사다.


#5

이 책에서 가장 좋은 건 역시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다. 노교수와 학생의 사랑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는 어느새 잊히고, 작가는 삶의 뒤틀린 지점을 집요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시간이었음을 깨닫고 회한에 젖는다. 회한(remorse)이란 어원적으로 한 번 더 깨무는 행위를 뜻한다. 인간이 다시금 회고한다는 건 그렇게 통증과 함께 일종의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그와 그녀는 다시 만날 수 없지만, 그 순간 그는 그녀를 깨물고 사라졌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기억할 수밖에 없다.

표제작 외 하나 더 꼽자면 <구멍>이라는 작품을 얘기하고 싶다. 친구를 죽게 한 사건을 겪은 후 인물은 평생 그 사고에 매여 산다. 머릿속으로 사건 재구성하며 제 과오를 탓하고 친구의 죽음에 미련을 남긴다. 당시에 경찰과 가족에 진실을 고백하지 못한 사실을 후회한다. 차마 상상으로도 친구가 여전히 살아서 자신과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시간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렇다 그는 무력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고통에 휩싸인다.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를 어떻게 구렁텅이에서 꺼내 줄 수 있을까. 앤드루 포터는 사건 당일 여름날 아득한 동네 풍경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마치 주워 담지 못한 진실이 거기 흩어져있기라도 하듯 그날 공기를 낱낱이 문장에 옮긴다.

“버지니아는 가뭄 철이었다. 2주째 비가 오지 않았고, 기온은 세 자릿수를 기록했으며, 저녁이 되어도 40도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늦은 오후의 공기는 투명하고 가볍고 아주 얇아서 마치 그 속을 움직여 다니는 것이 느껴질 정도이고, 눈을 찡그려 뜨면 쇄석 진입로 위로 물결치듯 솟아오르는 연기가 보일 듯했다.”

사람의 기억이란 편의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학은 인위적인 구원을 배척한다. 곪지 않도록 보호막을 씌울 순 있어도 거짓을 뱉을 순 없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은 폭력적으로 요약하자면 오직 제스처만 남긴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후회로 얼룩진 시간을 매만지며 기억을 추스르기 바쁘다. 결국 그 정도가 소설이 할 수 있는 다가 아니냐며 어깨를 으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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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상은 살면 살수록 알 수 없다. 전에는 뭔가 안다고 설쳤는데, 요즘엔 더 모르겠다. 나이를 먹을수록 미궁에 빠진다. 그래서 현실을 단호히 재단하고 사건을 손쉽게 해석하는 소설에 지친다. 섣부른 단정엔 진실이 깃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절망에 빠져 격정을 토로하는 이와 마주하는 것도 고역이다. 내게 작가는 다소 답답하더라도 주저하고 후회하는 사람이다. 가망이 없어도 되돌리려 애쓰는 사람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앤드루 포터는 고심 끝에 펜을 든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문장을 적는 작가다. 적어도 그런 사람은 신뢰하고 읽을 수 있다.

“나는 내 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구멍>에서 화자는 자신이 왜 그 구멍 안에 친구를 두고 왔는지는 함구한다. 지금 얘기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서 그런 걸까. 어차피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일이니 그냥 넘기는 게 최선일까. 내 생각에 작가는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시로 돌아가도 비극은 반복된다. 그날은 그저 신이 그에게 너클볼을 던진 날이었을 뿐이다. 거기엔 어떤 숙명적인 구석이 있어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다. 운명이 폐곡선을 타고 다시금 내게 날아오는 광경을.


표지 : 영화 버닝 스틸 사진, 마지막 사진은 박하사탕 스틸 사진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major.min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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