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양귀자 저
회의에서 늘 잘해보겠다고 뭔가를 적지만 쉽지 않다. 말해야 할 타이밍에 자꾸 그게 되겠어요, 라고 반문한다. 내가 잘되게 해야 한다는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뭐든 잘 될 턱이 없다는 전제로 말을 뱉는다. 툭툭 뱉은 비관이 테이블 주위에 앉은 이들을 향해 스며든다. 냉소는 마치 혈관처럼 사무실 곳곳으로 퍼진다. 오늘 쉽게 끝날 거 같지 않다. 이쯤 되면 나도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느 순간 꿈이 사라지면서 여기저기 흩어진 주전부리를 기틀 삼아 나아간다. 가령 아침에 받아 든 아메리카노 냄새, 점심시간에 허기를 참고 들른 헬스장의 눅진한 공기 같은 게 있다. 난 정부 소비 진작 정책에 맞춰 내 권태를 달래려고 스타벅스에 들른다. 헬스 장갑을 몇 개씩 바꾸며 눈앞의 지루함을 해치운다. 하지만 퇴근 후엔 그마저도 다 소진돼서 경고등이 뜬다. 완전히 고갈되기 전에 뭔가를 사려고 하면 은행 잔고에 공이 모자라다. 그럴 땐 선비처럼 책이나 읽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등 따시고 배불러 그런지 속 편한 허무에 찌들어 있다. 아니 이 고도 경쟁 시대에 난 왜 이리 나태한 생각에 빠져있을까. 뼈 빠지게 일하며 자기 계발에 힘써도 모자랄 판에 왜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나. 양심에 찔려서 수저 타령은 못 하겠고, 얼굴을 찡그리고 세상을 향해 일갈한다. 나는 그래서 오늘도 근면하게 비관을 적는다. 이쯤 되면 나도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느 시점까진 동기부여가 쉬웠다. 날 다그치고 북돋아 어떤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열망을 주입했다. 그건 어쨌든 나아진다는 확신이 있었고, 무궁한 가능성을 긍정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한계치는 분명해졌다. 삶이 모호하고 뿌연 파주 안개 같다는 생각이 들자 걸음이 무뎌졌다. 내 사이즈는 딱 지근거리에 걸쳐있다. 내 가능성은 딱 내 스펙으로 수치화되었고, 그 후론 권태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어릴 적에 조악하게 받은 적성검사 결과처럼 내 인생은 하나의 유형으로 굳어졌다. 서른 중반에 변변찮은 일을 하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 내 이력서는 그렇게 한계를 인정하면서 몇 줄 안가 끝이 났다. 서둘러 수정액을 흔들어 보지만 굳어버렸는지 국물도 없다. 이제 어머니 전화에도 눈치가 보인다. 결혼도 해야 하고, 잘난 아들 노릇도 해야 한다. 회사에서도 자꾸 주위 눈치를 살핀다. 파티션 아래 낮은 포복을 하고 사무실을 나선다. 화장실 거울에 서면 내 너저분한 옷에 신경이 쓰이고, 자꾸만 스스로 앞에 쪼그라든 느낌이다. 어느 자리에서나 불편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체면치레한다. 종종 아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 싶은 사람을 보고 경계하다가도, 종종 그런 놈과 비슷하게 구는 나를 보고 뜨악하다. 이렇게 시종일관 비관을 떠올리고 회의장을 나서면, 수첩에 '자코메티'를 닮은 앙상한 조각상이 그려져 있다. 그는 허공을 향해 손을 가리키고 있다. 이쯤 되면 나도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퇴근 후에 기분 전환하러 서점에 들렀다. 서가를 거닐다 인문 서적 코너를 보고 미간을 찡그린다. 힐링, 멘토, 위로 같은 말로 이뤄진 책들이 불티나듯 팔린다. 어째서 괜찮다는 둥, 다 그런 거라는 둥 뭔가 아는 척하는 놈이 왜 이리 많나. 이것들이 어디서 약을 팔아! 난 긍정이라는 말을 지독히 싫어한다. 되지도 않는 곳에 긍정을 끌어다 쓰는 통에 단어 자체가 오염되었다. 나 같은 비관주의자는 또 그 꼴 못 보지. 요즘 사회가 과도한 긍정을 강요하는 데 반감이 든다. 긍정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자연스럽게 머금는 기운이 아니라, 억지로 거는 최면에 가깝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눙치는 성마름이다. 레드선을 아무리 외쳐봤자 그런 식의 긍정엔 말짱 도루묵만 남는다. 책을 펴보면 죄다 뭉게구름만 피우는 내용이다. 실체엔 도통 관심을 두지 않고, 추상적인 격언을 주입한다. 심기가 불편해진 나는 서점에 와서도 기분을 잡친다. 이쯤 되면 나도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작가 해브록 엘리스은 긍정주의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삶의 핵심은, 그것도 긍정주의자로 사는 삶의 핵심은 아직 최상의 미래가 도래하지 않았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해지는 것이다.' 긍정이란 어쩌면 삶의 한쪽 면만 보는 걸지도 모른다. 인생의 무궁한 가능성을 배제하고 누구나 가는 길을 밟는 근면함이다. 그렇다면 예측 가능한 길은 정말 발 쭉 뻗고 잘 수 있는 ‘로열로드’일까. 그렇게 따지면 긍정주의는 음습한 어둠을 외면하고 올곧게 자란 자가 가진 딜레마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밟아가는 인생의 양태가 보편적이고, 뭐로 보나 그럭저럭 사는 것 같으면 남에게 쉽게 불평을 털어놓을 수 없다. 다들 그의 삶을 시샘하는데 권태롭고 허무하다고 속 편한 소리를 늘어놓기 어렵다. 오늘도 다음 뉴스 댓글난에는 공황장애로 고생한다는 한 연예인의 호소에, 한 네티즌이 배부른 소리나 한다며 돈 없고, 고생하면 그런 소리 못 할 거라고 힐난하는 댓글이 무수한 추천을 받았다. 한 네티즌은 재기 넘치게도 네가 '다자이 오사무'쯤 되는 줄 아느냐며 비웃었다.
양귀자 작가의 소설 <모순>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화자 진진은 인생을 두 가지로 도식화해서 보는데 익숙한 25살 청년이다. 그녀에겐 엄마와 이모라는 두 세계가 있다. 엄마는 가난에 허덕이지만, 특유의 억척스러움으로 전투를 치르듯 산다. 하루하루가 다사다난하다. 그에 반해 이모는 부잣집 사모님 노릇을 하며 아들딸 유학 보내고 낭만과 친구를 먹는다. 그런 이모가 조심스럽게 진진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삶이 너무 지루해서 무의미하다고. 나는 오히려 너희 엄마가 더 부럽다며. 엄마는 팔자가 늘어진 이모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진진이 요즘 만나는 남자도 각기 다른 부류다. 나영규는 유능하지만 어쩐지 너무 계획적이고 치밀해서 지루한 타입이다. 모든 게 예측되는 사람이 가진 키치함이랄까. 그 반대편에 선 김장우는 진진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감성적인 예술가 타입이지만, 가난하고 매사에 소극적이라 답답하다. 무엇보다 야망이 없고 현실감이 없어서 고민이다.
진진은 고비마다 이런 양가적인 선택으로 자신을 몬다. 다수가 믿는 가치라 해서 진실이 아니듯, 모두가 손사래 치는 인생에도 볕이 든다. 생각이 많아지면 사면초가에 빠지고, 생계가 급급해 하루를 바삐 살면 단출한 노동의 맛에 익숙해진다. 진진은 예측 가능한 삶의 부정적인 면을 먼저 의식한다. 삶이 내재한 비밀을 미처 보지 못하고 산다는 건 배움 없는 삶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독한 가난을 마주하고 사는 것도 고역이다. 지금은 25살이라 남자들이 곁에 머물지만, 엄마처럼 늙으면 외톨이가 되는 건 아닐까. 자신을 버리고 새 삶을 찾아 떠난 아버지처럼 가난한 놈 만났다가 엄마처럼 평생 돈에 절절매며 살면 어쩌지. 소설은 점차 막다른 기로에 선 진진의 인생을 독자의 고민으로 결부시킨다. 진진은 누구를 택할 것인가. 나는 어떤 신호등에서 멈춰 설 것인가.
소설이 생을 도식화하는 방식이 자칫 단순해 보여 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생을 두 가지 길로 집약하고야 마는 게 인간일지도 모른다. 진진은 결국 한 남자를 택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어떤 놈을 택하든지 간에 새벽에 들이닥칠 권태와 허무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가진 기질과 고민으로 이 가만한 삶을 헤쳐갈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그녀도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국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 은 한 시구에 이런 말을 남겼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세상은 내 감정에 관심이 없다. 다들 제 일에 바쁘니 타인을 향한 공감은 예의에 가깝다. 얼굴을 구기고 있으면 어딘가 불편한 놈이라며 꺼린다. 그래서 우리는 속내를 숨기고 가식적으로 상대를 대한다. 오늘 밤 혼자되기를 고대하며 버텨낸다. 스스로 고립된 페시미스트는 일상의 느슨함을 즐긴다. 아득바득할 거 없고, 어차피 세상 돌아가는 꼴에 기대를 않으니 나긋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등을 편히 기댄 채 킬킬거린다. 그러다 보면, 어 뭐야 이게 이렇게 지나갔네, 라며 능청을 떤다. 비관주의의 핵심은 요행을 바라지 않는 체념이다. 영화 <기생충>의 기택이 하는 말처럼 무계획은 아무런 계획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는다. 세상을 형편없이 바라볼 때 긍정이 자아내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건 애써서 구덩이를 피하지 않아도, 원체 세상은 구덩이 안이라 의미가 없다는 식이다. 이쯤 되면 나도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요즘 소확행이라는 말이 요즘 유행 이러던데, 내겐 그저 어차피 살아봤자 큰 행복이란 없으니 소소한 거에나 만족하고 살라는 소리로 들린다. 워라벨도 뭐가 됐든 일은 하고 쉬라는 소리고, 욜로도 인생은 한 번 뿐이니까 고생길이 훤하다는 말로 이해한다. 인싸는 왕따는 당하지 말라는 소리고, 아싸는 낙오하면 죽음뿐이라는 말이다. 이런 문장을 적고 나니 웃음이 히죽히죽 비어져 나온다. 오늘 아침은 햇볕 한 줌에 의지해 아파트를 나섰다. 근처에 핀 관목을 구경하면서 시야를 흐릿하게 하니 몽롱하게 취한 기분이다. 어쩌면 그것만이 진짜일지 몰라 눈을 떼지 못한다. 이쯤 되면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