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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17. 2019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저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저서 <왜 고전을 읽는가>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고전이란 읽지 않았어도 읽은 것처럼 말하는 책이다." 고전은 표지 한 번 보지 못해도 작품에 관해 몇 마디쯤 보탤 수 있다. 내용을 몰라도 의례 뛰어난 문학에 따라붙는 몇몇 레테르를 기억해놨다가 술자리에서 아는 척한다. 말하면서 죄책감이 들다가도,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한다. '이것으로 성공인 건가.' 난 이런 허풍마저도 책을 사랑하는 한 형태라 여긴다. 별 뉘우침 없이 희희낙락한다. 속으론 어차피 앞으로 읽을 거니까 괜찮다고 변명한다.

 비단 고전뿐만이 아니라 내게 독서는 그 자체로 허영이다. 늘 의무와 성취를 기저에 두고 책을 읽는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고 막연하게 믿어버린다. 난 문학을 과장하는 언사에 질색하지만, 내심 작품이 내게 건네줄 뭔가를 고대한다. 진득하게 읽지 못하고 긍긍하며 요행을 바란다. 단순히 흥미로워 책을 곁에 두지만, 타인에게 근사한 말을 뱉고 싶어서 밑줄 친 문장을 외워둔다. 난 어쩌면 승산 없는 인정투쟁을 위해 여태껏 불룩한 가방을 들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애를 써도 문학적인 삶은 어림도 없다.

 주말이면 서점에 가 문학도라면 능히 읽을만한 책을 골라 나온다. 드높은 명성과 그만큼 난해하다는 악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딱딱한 표지를 만지며 감격한다. 책을 고를 때 이름값을 따지다 보니 늘 명사의 추천에 귀가 펄럭인다. '지식인의 서재' 추천 도서를 기웃거리고, 노벨문학상, 부커상, 퓰리처상, 공쿠르상으로 우열을 가린다. 알려지지 않은 책은 등한시하고, 대문호의 품에서 아양을 떤다. 그렇게 책장에 꽂아두고 방치한 책이 한 트럭이다. 엄마는 내가 그 책을 다 읽은 줄 알고 의아해하신다. 책을 많이 읽으면 분명 지혜롭고 현명한 어른이 된다고 믿고 계시는데, 난 여전히 소파에 누워 발가락을 후비는 어리석은 아들일 뿐이다.

 나처럼 허영심으로 책을 읽는 병이 생기면 요즘 트렌디한 책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현실이 가리키는 바를 성실히 기술하는 요즘 작가와 멀어진다. 이왕이면 어디 가서 한마디 보태기 좋은 책만 고르니, 최근 떠오르는 화두를 놓치고 산다. 고매한 지성의 가르침에 정신이 벙벙해서 시대를 살피는데 게을러진다. 그런 와중에 내게도 올해 베스트셀러를 읽을 기회가 생겼다. 그것도 차별과 평등에 관해 진지하게 말하는 책이다.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책이다. '누가 차별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 걸 모르나.'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뻔한 말을 책으로 읽긴 싫었다. 흥미진진한 문학이 읽고 싶었던 차에 하품이 절로 나왔다. '이건 어디 가서 떠들지도 못할 얘기잖아. 괜히 한마디 보탰다가 욕먹기에 십상이지.' 이런 생각으로 책을 폈고, 책장을 다 덮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며칠 전 한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너는 세상 모든 시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직업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오는 길에 본 뉴스 기사를 떠올리며 뱉은 말이었다. 기사는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직업 1위"라는 제목이었다. 네가 최고라니까 얼마나 좋을까. 나였어도 좋을 것 같아서 스스럼없이 추켜세웠다. 내 딴엔 듣기 좋은 농담이라고 실실 웃으면서 과장했다. 그의 입장을 상상하지 못했다. 결혼 생각이 있는지도 모르는 친구를 결혼을 원하는 30대 여성이라는 범주로 구분했고, 더욱이 시어머니에게 잘 보일만 한 신붓감으로 대상화했다. 그가 어떤 삶의 방향을 바라며 사는지도 모르면서, 모두가 좋아할 만한 스테레오타입으로 그녀를 재단했다. 지레짐작으로 한 사람을 세상이 정한 틀 속에 한정시켰다. '이런 말을 지겹게 들었을 텐데, 나도 그 지겨운 놈 중 하나가 됐구나.' 아무리 문학을 읽고 뭘 좀 안다고 써대도 이 모양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기분이 나쁜 내색을 했음에도 '뭘 그리 발끈해'라는 표정으로 무안을 줬다. 사과는커녕 내 말이 별거 아니었다는 식으로 눙쳤다. 난 훌륭한 방어기제를 갖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음 날 쓴 커피를 마시면서 기억을 곱씹을 때 뭔가가 버석거린다고 느꼈다. 이후 며칠 동안 불편한 마음이 날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고순(고현정)은 자신의 인생과 배우자에 대해 섣불리 넘겨짚는 경남(김태우)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그냥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세요." 난 늘 더 나은 삶을 갈구하지만, 그래서 목놓아 뭔가를 주장하지만 언제나 잘 알지 못하는 처지다. 이해도 못 할 책을 보면서 아는 척할 뿐이지, 딱 아는 만큼만 말하지 못해 실수 연발이다. 소설 속 무수한 화자들이 그렇게 실수를 해서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데, 난 연일 문학을 붙들고도 여전히 덤벙대는 걸 보면 책이 사람을 나아지게 한다는 건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시대가 지목하는 거대한 흐름이 있다. 젠더, 페미니즘, 난민 등 소수자에 관한 논의는 이제 멈출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시류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말미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인용한 문장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하는 대목이다. 김지혜 작가는 이에 대해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내가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으며 불편했던 건, 내 민낯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은연중에 내가 초라해질까 봐. 무디고 무심한 내 일상이 도마 위에 오를지 몰라 불안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라는 말이 가진 폭력성을 알면서도 기어코 선의를 내세웠으니까. 내가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사회의 엄연한 일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 역시 의식하지 못한 터에 다수 입장에 서서 바깥을 멸시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시대가 언어에 민감한 감각을 요구함에도, 딴청을 피우며 허영심을 채우기 바빴던 걸까. 대화에 섬세하지 못하면 많은 걸 놓치고 산다. 결국 모든 판가름은 섬세함에 있다. 악마도 정교함에 있고, 상황을 가늠하는 예민한 감각 없이 문학은 성립할 수 없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첨예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쉽지 않다. 누구나 부담스러워하는 사안을 적시하는 글을 쓰기란 얼마나 지난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간결하게 정리했다. 일종의 개론서처럼 쉽지 않은 내용을 잘 읽히게 적었다. 무엇보다 누구도 불편하지 않도록 모서리를 뭉뚝하게 다듬었다. 오해를 부르지 않도록 자극적인 묘사는 줄이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답을 쥐여줘야 하는 부분에선 단호했다. 작가는 굳이 왜 그렇게까지 차별에 신경 써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에 이런 말을 남긴다. "고정된 '옳은' 삶을 규정하지 않는 이 해체의 시대가 버겁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는 인류가 지속해서 갈구하는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거대한 정의를 부르짖는 말에 현혹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일상의 작은 것에서부터 위엄을 찾으려고 애쓴다. 지금 눈앞에 닥친 건 출근길이고,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회의 석상에서 마주할 동료가 엄연한 현실이다.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누군가 말을 시작하면 자르기 바쁜 성미를 죽이고, 팔짱을 풀고 들어봐야 마땅하다. 난 잘 알지 못하니까. 대의를 우러르는 시퍼런 젊음도 중요하지만, 귀찮고 거슬려도 누군가의 고통을 들어보려는 끈덕진 태도를 동경한다. 내 맘처럼 돌아가지 않는 이 도시에서 제대로 생각하고 살 수 있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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