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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31. 2019

연애소설과 함께한 고요한 밤

전화하지 않는 남자 사랑에 빠진 여자, 로지 월시 저

 난 연애소설이 별로다. 연애를 소설로 읽긴 뭔가 쑥스럽다. 오그라들고 문학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곰곰이 따져보니 짧은 생 이왕 읽는 거 누구나 알만한 책으로 뻐기는 게 낫다고 여긴다. 명성 게이지 100인 소설만 문학으로 보이고, 로맨스물은 가볍다고 무시한다. 사랑은 일상에 늘 잠복해 있는데, 연애를 글로 읽으면 마치 세상이 온통 사랑꾼들의 소굴로 보인다. 연애만이 사랑의 환승 통로라도 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눈꼴셔서 못 봐주겠네.

 제대로 생각하려면 왠지 고고한 문학을 읽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자꾸 먼지 묻은 책을 읽다가 카페에서 존다. 난 스스로 '깊이에의 강요'에 빠져있다. 비싼 돈 주고 책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다. 문학이 내 삶을 바꿔줄 거라는 설핏한 기대가 있다. 어디 가서 말하긴 부끄럽지만, 톨스토이같이 긴 수염을 단 노인이 다가와서 날 구원해줄 문장을 건네주길 기다린다. 할배는 여태껏 날 외면했지만 그건 내 독서량이 부족해서다. 오늘부터 한 줄이라도 더 읽다 보면 혹시 아나, 내 삶을 흔들 근사한 영감을 손에 쥘지. 이런 시커먼 속으로 독서를 하니 줄곧 한심한 상상만 한다. 순수한 감응은 잊은 지 오래고 요행을 바라며 문장을 썼다 지웠다 한다.

 내 일상은 온갖 복잡한 고민에 휩싸여 있는데, 온통 연애 생각뿐인 소설은 견디기 어렵다. 마치 감정을 깔때기로 오므린 것처럼 단선적이다. 일상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정체 모를 어둠엔 관심이 없다. 그저 고민 없이 '그건 다 네가 진정한 사랑을 못 해서 외로운 거야'라며 통박한다. 근데 그렇게 연애소설을 욕해도, 막상 연애를 시작하면 오직 그대만 보인다. 그래서 덮어놓고 연애소설을 비난하긴 어렵다. 연애는 부스러지는 하루에 발라주는 보습크림처럼 촉촉하다. 상마초 헤밍웨이 님마저 최고의 글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나온다고 말하지 않았나. 요란 떠는 남녀의 상열지사에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자고 생각한다. 너랑 나도 연애할 때 다 그랬잖아, 인마.

 큰맘 먹고 표지부터 알록달록한 <전화하지 않는 남자 사랑에 빠진 여자>라는 갓 출간한 소설을 샀다. 연애소설을 멀리한 지 어언 십 년. 사람 쉽게 안 변하는지 이제 와 재밌을 리 없다. 아직 읽지 못한 대문호의 소설이 책장에 빽빽한데 한갓지게 로맨스나 읽냐며 소파에 던져버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가 무척 좀스럽다. 편견 없는 어른이고 싶었는데 문학마저 편견으로 더럽히다니. 폴 매카트니가 음악에 대해서 편견을 갖는 것은 인종차별보다 무섭다고 했다던데. 난 다음 주에 제인 오스틴이 환생해서 신간을 출간해도 장르가 연애소설이라고 무시할 참이다. 오늘부터라도 당장 다양한 장르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편식은 금물이니 밥상에 시금치라도 꺼내 놓는 기분으로 꼭꼭 씹어 읽자.

 소설은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끝이 난다. 역시 연애는 클리셰지. 우리의 연애가 다 비스름한 것처럼 주인공 사라와 에디도 우연히 마주쳐놓곤 서로가 운명이라고 확신한다. 그가 살아온 삶이 순전히 내게 수렴하기 위한 공식으로 보인다. 하도 오랫동안 주말드라마를 못 봐서일까. 요런 통속극이 그리웠는지 쏠쏠히 잘 읽힌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으니 알콩달콩한 로맨스가 남 얘기 같다. 맨날 아트하우스에서 음습한 사랑 얘기만 접하다 보니 손쉬운 로맨스가 기껍다. 마치 커피 믹스처럼 달곰하고 느끼한 게 살찌는 기분이다. 요즘 따라 우연으로 점철된 통속극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텔레비전을 사야 하나 봐. <올드보이>의 오대수도 말하지 않았나. 텔레비전은 시계이자 달력이고 학교고, 교회며, 친구이자, 심지어 애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마치 미드를 보는 것처럼 장면장면이 익숙하다.


 소설의 잔재미가 빼곡하다. 물론 걸작은 아니지만, 상황마다 실감 나는 대사를 공들여 적었다. 어색한 미팅에서 위트 하나로 너스레를 떠는 김 대리처럼 달변이다. 저자는 마치 탁구처럼 날렵한 구어체를 구사한다. 무엇보다 서로를 위해주는 사라의 친구들이 다정하다. 그들만 있다면 그깟 운명의 연인 따위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결정을 무조건 지지해주고, 슬플 땐 같이 울어버리는 아늑한 공동체가 이뻐 보인다. 내가 추측하기론 저자 '로지 월시'는 실제로도 좋은 대화 상대일 것이다. 실감 나는 대사 덕분에 인물들이 주변 어디선가 본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어찌 그리도 애틋한지 메모장에 적어놨다 누군가를 위로할 때 써먹어야 할 판이다. 그리고 SNS와 페이스북, 메신저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능통하다. 상대의 안위와 근황을 살피는 데 전화나 편지가 아니라, 즉시 소통 가능한 폰이라는 건 소설가에겐 비극에 가깝다. 첨단 통신 기기는 기다림이 주는 애달픔과 간절함을 앗아가니까. 하지만 로지 월시는 이런 페널티를 오히려 서스펜스의 장으로 끌어냈다. 상대의 온라인 프로필로 근황을 살피고, 메시지를 요샛말로 읽고 무시하고 다시 쓰다 말기를 반복해서 상상의 뭉게구름을 만들어낸다. 마치 요즘 연애 풍속도의 용례집처럼 보인다. 21세기형 서간 소설은 이모티콘과 세로로 긴 화면에서 오가는 톡들이 장식할 것이다.


 사라는 운명이라고 믿었던 에디에게서 연락이 끊기자 어쩔 줄 모른다. 실연은 사람을 도시의 변두리로 몰아내니까. 그녀는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가장자리에서 비척거린다. 이 소설에서 마음이 쓰였던 부분은 사라가 묵묵부답인 그를 견디는 순간이다. 섣부른 조바심에 사라는 자신의 과오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고백하고, 검색창에 '헤어진 연인에게서 연락 오게 하는 방법'을 적는다. 실연은 사람을 궁상맞고 지질한 꼴로 망친다. 연애는 우릴 때려눕히지만 우린 괜찮은 척 출근해서 다시 일한다. 이별은 번거롭고 힘들지만 먹고 움직이다 보면 어찌 되든 되긴 한다.

 난 사랑이 지나간 이후의 여파에 관심을 쏟는 사람이다. 그 증거로 소설 후반부를 읽는 데 자꾸 지쳤다. 내겐 그들의 요란스러운 감정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작가 이동진은 <이동진 독서법>에서 "장르 문학은 사건 자체의 자극에 집중한 소설이지만, 순수문학은 사건의 여파를 다룬다."라고 정의했다. 난 격정적인 감정에 쉽게 질린다. 온 세상을 환희로 채우는 첫 만남과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실연의 아픔이 버겁다. 나를 매혹하는 건, 모든 게 사라진 후의 공기다. 혼자 회한을 곱씹느라 방구석에서 웅크린 몰골이다. 내 어두운 기질은 오락가락하는 그들의 감정을 쫓기 급급했다.

 내게 사랑이란 운명을 신봉하는 자세다. 로또 복권은 어쨌든 한 명 이상의 당첨자를 낸다. 복권 운용사 입장에선 매주 등장하는 당첨자는 우연의 산물이다. 하지만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번호를 맞춰보다 졸도할 것처럼 기뻐하는 남자는 운명을 만난 셈이다. 사랑도 그렇다.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일을 사랑에 빠진 연인이라면 운명으로 해석한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우연을 멸시하지만, 연애소설은 유일하게 우연을 수용하는 문학이다. 사랑마저 미화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그 밤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당신만 있다면 모두 가진 것 같았던 순간이 있다. 온 세포가 봉기한 채 절절맸던 그 시간을 '필연'이라는 말로 어떻게 해석해낼 수 있을까. 사라와 에디는 누가 봐도 우연에 빚진 인연이지만, 이걸 운명으로 믿고픈 내 바람에 힘입어 하나뿐인 운명이 되었다. 그들이 겪은 안타까운 사연도 사랑 앞에선 무력하다. 우사인 볼트처럼 가뿐하게 뛰어넘고 개운한 결말로 다가간다. 비록 내가 당첨된 로또는 아니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지하철에서 사람 구경을 한다. 4호선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처박고 스마트폰에 여념이 없다. 가끔 나처럼 넋 놓는 사람과 눈이 마주쳐 서둘러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한강은 다른 세상처럼 눈이 부시다. 이마를 가리고 눈을 찡그리다 다른 사람 구경한다. 예쁜 여성을 훔쳐보는 것도 좋고, 셔츠가 구겨진 남자의 어젯밤을 상상하는 것도 재밌다. 그러다 가끔 책을 읽는 사람을 마주할 때가 있다. 난 호기심이 적은 데 이상하게 누가 책을 읽고 있으면 온 세포가 봉기한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이 뭔지 보려고 갖은 수를 다 쓴다. 주저앉아 신발 끈을 묶는 척하고, 몰래 흘낏거리며 문장을 가늠한다. 이상한 동조 의식이 생겨서 독서를 하는 그에게 막연한 애정을 느낀다. 이런 순간이면 난 문학을 믿고 싶어진다. 연애 소설이 내게 이런 느낌을 선사할 수 있다면 장르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게 운명이 아니면 뭘까. 그게 누군가 말하는 순수문학은 아닐까

 어떤 통계를 보니 연애를 많이 할수록 평균 수명이 길다고 하더라. 결국 운명을 믿는 자는 목숨마저도 남들보다 쉬이 보전한다. 뭐가 됐든 사랑 안에 거하는 게 장땡이라는 말이다. 당신 옆에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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