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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04. 2019

어찌할 바를 몰라서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여의대방로를 운전하다 하도 차가 막혀서 라디오를 틀었다. 청자와 전화 연결을 시도하는 DJ의 목소리가 들린다. 청량한 기운에 잠이 달아난다. 점심 무렵이라 그런지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전화를 건 젊은 여성이 인사를 한다.  DJ는 20대 직장인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자기소개를 청한다. "사무실에서 잡일하고 있는 아무개입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업을 '잡일'이라 명한다. DJ는 물론 운전을 하는 나도 살짝 당황한다. DJ가 겸연쩍은 듯 웃으며 어떤 일을 하는지 다시 묻는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이 진짜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이나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근근이 먹고 살기는 하지만 보수가 적고, 하는 일에 가치를 못 느껴 조만간 그만둘 거란다. 다소 위악적이고 신랄해 듣기가 힘들다. 무엇보다 다분히 자신을 비하하는 뉘앙스가 있어 마음이 껄끄럽다. 겸양의 미덕이 아닌 자괴에 가까워 불쾌함을 자아낸다. 두 사람의 통화는 짧게 끝났으나 그녀의 신청한 곡인 넬의 신곡이 오늘따라 구슬프게만 들린다. 꽉 막힌 도로엔 자비가 없다.

 며칠간 그녀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침대에 누워서 그녀의 삶을 상상했다. 통화를 마친 그녀의 작은 방의 시간을 구경했다. 작은 창문으로 본 거리 풍경이 어쩐지 삭막하다. 그녀의 말을 남 일처럼 방관할 수 없어서 그 방에 나도 머물렀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이 취업난에 직장을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으리라. 적성에도 안 맞고 재미도 없지만, 그저 퇴근까지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하겠지. 그게 아니라면, 잡일이면 어때 그게 숨길 일인가. 되려 주눅 들지 않고 더 나아질 미래를 상상하며 지금의 나를 타박했을지도 몰라. 지금 대한민국에선 하릴없이 제 길 찾기 바쁜 고학력자들이 득실거리니까. 어떤 일이든 기어코 하고 있으니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 난 잘 모른다. 오늘 하루 수습하기 급급해 별 생각이 없다. 오늘 하루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휴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는 상황. 타인의 일에 무감각하고 내 안위만 살피는 것만으로 벅찬 일상.


 최근 한 독서 모임에서 <19호실로 가다>라는 소설집을 읽었다. 이 책이 페미니즘 소설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얼핏 들었지만, 내겐 그보다는 시대가 살피지 않았던 고립된 곳을 비추는 이야기로 들렸다. 작가 도리스 레싱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들추듯, 미심쩍은 상태로 남겨진 고독을 들춘다. 그건 비단 누군가의 하루짜리 삶일지도 모르지만, 시간 속에 부유하는 외로움의 공기는 스산하다. 어쩌면 좋은 사회란 자신을 스스로 탓하는 이에게 그런 삶도 꽤 돌볼만한 가치가 있음을 귀띔해주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로 말미암아 내가 동경하는 사람은 사위어가는 존재를 상기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고민에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고 그러냐’는 식이 아니라, 사무실 한구석에 굽은 등을 내보이며 뭔가를 적는 사람의 속내를 상상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어제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누명으로 옥살이를 하고 나온 한 사람이 사연을 구경했다. 울분에 찬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불편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말을 이어간다. 그 당시엔 아무도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오로지 신만이 자신을 구했다고 읊조린다. 무관심을 유일한 미덕으로 여기는 도시에서 그는 거리에 비쭉 솟은 네온 첨탑을 보고 구원을 떠올렸다. 무수한 목소리가 횡횡하는 이곳에 사는 게 고독하다는 많은 이의 글을 엿본다. 전화할 누군가를 찾지 못해 모니터를 응시하며 익명으로 고독을 토로한다. 얕은 인식을 들킬까 무서운 나는 지금도 뭔가를 붙잡고 읽지만 좀처럼 어찌할 바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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