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빛
난 문장에서 어떤 상징이나 은유를 발견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저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려 애씀으로써 사고를 확장한다. 내 구태의연하고 틀에 박힌 일상이 전혀 다른 양상을 가진 허구의 세계에 포개지며 색다른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적어도 일상에서 불시에 찾아든 딜레마를 문학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브론스키와 만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책을 꺼내 든다. 그녀는 소설을 읽었고 무슨 내용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읽는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생활을 뒤따라간다는 게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그녀는 당시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브론스키가 남긴 채취와 제스처를 거역할 수 없었다. 헤아릴 수 없이 긴 벌판을 가로지르는 기차에서도 마음이 밀접해진다는 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현현한 욕망이 발현하자 책이라는 간접 경험은 시시하게 보일 수밖에. 소설을 읽는 행위는 가상의 인물을 따라 낯선 풍경에 발을 디디는 경험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실제가 눈앞에 아른거리면 소설은 그저 일차원의 가상에 머문다. 실감이 없으니 무력한 마음에 시달린다.
독서가 가진 한계를 인정할 때 전에 없이 삶이 허탈해진다.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쓰며 창밖을 보면 갇혀있다는 느낌에 속이 부대낀다. 일상은 비좁고 편협하다. 문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동경하면서도 글을 쓰는 자신이 버겁다. 나를 벗어나려 해봐도 사무실은 차갑고 단단하다. 그럴 때 난 내리쬐는 빛을 낯에 담는다. 겨우 그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일상의 보호막이다. 나의 무기력을 따사로이 비춰주는 빛의 호위에 몸을 맡긴다. 아스라이 떠오르는 과거를 비추는 빛의 가능성이 나를 머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