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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11. 2019

어항 속의 금붕어

옥중수고, 안토니오 그람시 저

 금요일 퇴근길 좋은 사람을 만나러 간다. 귀에선 서정적인 멜로디가 흘러 이른 퇴근을 축하한다. 네온 속으로 지는 노을을 보니 절로 긴장이 풀린다. 가을은 만년설 덮인 들판에 드리운 빛처럼 저물어간다. 콧노래가 나오고 매일 스쳐 가는 동네 슈퍼도 아늑해 보인다. 난 신이 있다면 이런 형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단추 하나를 풀고 볼륨을 키웠다.

 1호선에 올라타 익숙한 바깥에 눈을 뒀다.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은 주말의 낙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노량진역에 거의 다다라서 지하철이 급히 멈췄다. 다소 쉰 목소리의 기관사가 모두 내려달라고 방송을 한다. 나를 비롯해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떠밀리듯 개찰구로 향했다. 달아난 낙관을 아쉬워하며 바삐 갈 길을 갔다. 나도 휩쓸려 계단을 오르려는데 누군가 사람이 투신했다고 알려줬다. 난 짐짓 머뭇거리다가 다음 트랙을 누르고 발길을 돌렸다.

 버스를 타기 위해 나온 노량진의 부근은 분주했다. 학원으로 향하는 무거운 가방을 든 아저씨와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청년이 노점에서 사이좋게 어묵을 먹는다. 오랜만에 고시촌 부근을 걸으니 여전한 사람들이 보인다. 무서운 속도로 뚫고 지나가는 119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고위공직자 자녀 특혜 채용에 관한 뉴스가 옥외 전광판에 떠오른다.


 비극은 전조가 없다. 그 어떤 개연도 무마해버린다. 소설로 쓰면 허무맹랑하다고 혹평을 들을만한 사건이 일상을 침범한다. 영화로 치면 지나친 우연을 남발한다고 욕을 먹을만한 비극이 빗발친다. 호사가들은 결과만 보고 징조를 찾지만, 일이 벌어지기 전에 운명을 예지하는 사람은 없다. 씨실과 날실처럼 온갖 경우의 수가 생을 유린한다. 무지몽매한 피조물은 그저 엎드리고 삶을 받아들 수밖에 없다. 맞닥뜨린 비극 하나하나가 당사자에겐 운명이니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눈치를 살피며 산다. 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지구를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블록버스터를 보며 내 안전을 확인한다. 스크린을 매운 스펙터클에 취해 뮤턴트로 분한 배우를 절대자로 착각한다.

 헤게모니라고 했던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저서 <옥중수고>(Prison Notebooks)에서 계급 간의 관계를 도식화한다. 헤게모니란 계급을 통해 단지 힘의 위력으로서만이 아니라 제도, 사회관계, 관념의 조직망 속에서 동의를 끌어내는 수단이다. 다시 말하면 성공적인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의 이해뿐만 아니라 종속 집단인 피지배계급이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한다. 마치 상식적이며 자명한 것처럼 천연스럽게 옭아맨다. 더 나아가 헤게모니는 단지 경제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사회의 문화생활 속에 존재하는 통합적 형상에 가깝다. 우린 헤게모니 안에서 마치 그것이 인생의 모든 것인 양 교육되어, 그 우물이 조금만 탁해져도 숨을 쉬지 못한다. 마치 대야에 갇힌 잉어처럼 그곳에서 팔딱거리다 맨바닥에 떨어져 질식하고 만다. 난 이 책을 읽으며 그건 마치 창조주의 논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난 이 도시를 뒤덮은 혹독한 양상을 의식하며 517번 영등포행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새롭게 지은 노량진 수산시장 불빛이 영롱하다. 분주한 밤이 다시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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