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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14. 2019

이제 다시 겨울이다

이제 다시 겨울이다. 결국 겨울과 다시 만났다고 해야 하나. 나는 유독 겨울을 좋아한다. 커피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영화관을 들어갈 때 느낌이 좋다. 세탁소에 두꺼운 옷을 찾고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올 한 해가 썩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난 흐르는 시간에 발도 못 맞추고 어영부영 좇기 바빴지만, 그럭저럭해냈다. 늘 가던 영화관과 스타벅스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지만 그게 나란 사람인 것 같다. 매일 걷는 동네 풍경이 유달리 이뻐 보인다. 출근길 공기가 푸르고 맑다.


날씨가 추워지고 술자리가 잦아졌다. 뜨끈한 국물과 밤거리 풍경이 그리운 계절이라 그런가. 지나간 일을 정리하고, 새로운 뭔가를 떠올리는 시기다. 삼삼오오 모여 술집에 앉아 두런두런 회한을 나눈다. 하지만 술자리 후엔 늘 부담이 날 조여온다. 늘어나는 허리띠가 불안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헬스장에서 쇠와 씨름한다. 기구 몇 개만 덩그러니 놓인 작은 공간이지만 땀을 빼고 샤워를 하고 나오면 부자가 된 것처럼 평온하다.


퇴근 후에 광화문역 뒷길에서 어묵을 빼먹으며 두리번거렸다. 오늘처럼 책이 읽기 싫어지면 그냥 무작정 어디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고심 끝에 성곡미술관에 갔다. 경희궁 주변을 자주 걸어 다니면서도 성곡미술관은 처음이었다. 서울 역사박물관과 이어진 경희궁은 늘 텅 비어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보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신문로를 걸으면 평소 눈여겨봤지만 한 번도 들른 적 없는 커피집들이 즐비하다. 골목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무한리필돈까스 백반집이 있고, 좁은 골목길엔 사이사이 출판사와 신문사들이 보인다. 미술관은 신문로 끝자락에 위치한다. 남루하고 초로한 저택이 보이고, 그 뒤로 정원에 세워둔 조각들이 이뻐 보인다. 서서히 둘러보고 걸어 나오는데 대형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헐렁한 셔츠에 무표정을 한 여인. 정사각형 프레임 속 그녀는 세상만사가 귀찮은 표정을 짓고 서 있다.


카페에 들려 <작가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었다. 뉴욕 문학 잡지 파리 리뷰에 실린 거장의 인터뷰집이다. 작가라는 작자들이 이야기를 짜내기 위해 그들의 일상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보는 재미가 있다. 레이먼드 카버는 작은 폭스바겐 운전석에 앉아 속 썩이는 마누라와 아이들을 피해 이야기를 썼다. 들끓는 속을 억누르고 펜으로 꾹꾹 눌러쓰는 그의 등이 떠오른다. 카버는 자신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자주 상상했다. 소설은 탈출구가 되어 만일이라는 가정으로 그를 이끌었다. 삶의 위태로움을 이야기에 녹여 현실에 텐트를 쳤다. 부실하고 허술하지만, 그 밀폐됨에 의지해서 삶을 지탱한 셈이다.


요즘 따라 글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적고 지웠다 뭉개기를 반복한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숨만 쉬다 잔다. 브런치 운영에 부침이 있긴 했어도 요즘처럼 펜에 힘이 빠지긴 처음이다. 이런다고 불현듯 새로운 글감이 떠오를 리 없다. 이곳저곳 웅덩이를 파서 그 안을 들여다볼 수밖에. 하긴 언제는 글이 잘 써진 적이 있었냐. 화가이자 포토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유명한 미국 사진작가 척 클로스는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라는 말을 남겼다. 뇌수가 내리치듯 쏟아지는 영감이란 애초에 허상이다. 다시 고개를 들고 키보드에 손을 얹고 계속 이상한 문장을 적는 거다. 축축 처지는 어깨와 신변잡기로 쏠린 정신을 가다듬고 어렵사리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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