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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14. 2019

마지막 축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푸르스트

 회사를 나서면 앞길이 막힐 때가 있다. 어디 카페로 가지. 오늘은 갈피를 못 잡다 한강진역에 내렸다. 공기가 상쾌해 내키는 대로 골목을 파고든다. 버지니아 울프가 옷 속에 돌덩이를 넣고 우즈 강에 스며들 때도 이렇게 맑았다. 어쩌면 날씨는 그 자체로 문학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뒤바꿀 수 있는, 그날의 기분을 달리하니까. 다행인지 아닌지 오늘은 무구한 하늘이다. 한참을 걸어도 힘들지 않을 만큼 청량하다. 괜스레 들떠 뭐라도 눈에 들어올까 두리번거린다. 골목이 실종된 서울에서 이 부근은 아직까지 곱이곱이 난 골목이 건재하다. 집 구경 사람 구경 고양이 구경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가 바람에 휘날려온 전단에 눈길이 간다. 녀석은 머리 위까지 날아오르더니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어쩐지 의미심장해진 난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는다. 오픈! 초대박 세일! 헬스 등록하면 요가 필라테스 복싱까지 무료! 난 삶 속에서 뭔가를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이런저런 곳에 의미를 부여하곤 잘도 떠든다. 한낱 전단에 적힌 글자마저도 달리 보여 번거롭다. 그렇게 쉼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이태원에 다다른다. 이태원은 한낱 의미도 없지만, 이제 어디든 들어가 앉아싶어 해밀톤 호텔 어귀에서 사위를 살폈다. 손도 아프고 다리도 쑤시고 배도 고파.


 근처 식당에서 백반을 먹었다. 주위에 앉은 사람들이 지쳐 보인다. 칠천 원에 고등어와 장조림이 나온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뉴스를 보며 식사한다. 누구 하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생선을 바른다. 고위층 인사의 비리와 향응에 대한 내용이 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선은 기가 막히게 맛있다. 그릇을 치우는 아주머니의 손놀림은 재빠르다. 기자들을 피해 급히 들어가는 유력 인사의 발걸음은 보다 날래다. 이 야만의 세계를 시시하게 보려면 결국 혀를 차며 무시하는 길 뿐이다. 시시하게. 그깟 돈, 그깟 권력, 그깟 연애, 그깟 정치. 다 시시하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질병을 안고 작품을 썼다. 현대인이 앓는 각종 질병을 온몸에 품었다. 사망하기 16년 전부터는 나는 곧 죽는다고 떠벌리고 다녔을 정도다. 늘 불면증과 만성 통증에 시달렸던 그는 잠이 안 오면 열차 시간표를 읽었다. 밤낮을 거꾸로 살며 집필에 몰두했고 여행보다는 안내 책자를 읽으며 만족했다. 프루스트는 일이 틀어지기 전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고 단언했다. 행복은 몸에 좋지만, 마음을 키우는 건 슬픔이라며 고통 없는 인생의 허망함을 말했다. 그는 통증이 뭔가를 깨우친다고 믿었고, 그 생각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포갰다. 그는 마들렌을 먹다가 불현듯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홍차 향기가 잠든 심연을 건드렸다. “갑자기 모든 기억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맛은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고모가 차에 살짝 담가 내게 건네주던 바로 그 마들렌 맛이었다.” 난 저녁마다 홍차와 마들렌 대신 동네 커피집에서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을 먹는다. 저녁 11시,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고개를 드니 카페 직원들이 분주하다. 잔여들이 나가주길 바라는 눈치다. 난 153번 버스를 타고 여의도에서 내렸다. 여전히 밤은 차고 커피 때문인지 피로한 기미는 없다. 하늘을 보니 이번 주말은 이 가을의 마지막 축제가 되리라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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