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Nov 16. 2019

서울 하늘은 흐림 우중충

마음, 나쓰메 소세키

 역시 비 오는 날은 별로다. 아침부터 내리는 부슬비를 보니 외출할 기분이 싹 가신다. 작년에 호기 좋게 부모님과 파리 여행을 할 때도 이렇게 비가 내렸다. 잘난 아들 역할을 겸한 실로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운 일정이었다. 난 모처럼 효자가 될 기회가 와 의욕에 넘쳤다. 근데 이놈의 비가 도와주질 않네. 열흘 남짓한 여행 기간 동안 매일 새로운 동네를 구글맵에 의지해 얼마나 걸었던가. 날씨만 좋았다면 그 모든 여정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을까. 복잡한 파리 대중교통을 몇 번씩 갈아타고, 입에 맞지도 않는 프랑스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부모님 눈치를 얼마나 봤던지. 그래도 장한 아들이라고 연신 감탄을 늘어놓는 두 분을 보며 으쓱했다. 그저 수많은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전과같이 낭만적으로만 보이진 않으리라 짐작했다.


 TV에서 보던 유럽은 늘 화창한 날씨로 어머니를 유혹했다. 내가 처음 프랑스 남부를 렌터카로 여행할 거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 어머니에게 프랑스란 샹젤리제 거리의 화려한 불빛과 개선문의 여유였다. 그녀의 머리엔 수많은 박물관과 튈르리 공원의 산책길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하지만 여행이란 게 기대를 꺾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유람선을 타고 에펠탑이 비치는 파리 시내 야경을 본 이후로 여행을 향한 기대치는 내리막을 걸었다. 환상이 사라지면 현실 세계의 먹고사니즘이 눈에 들어온다. 교통체증과 바쁜 일에 치여 고달파하는 파리 시민의 얼굴을 그제야 포착한 것이다. 프랑스인들의 눈빛엔 우리가 명동의 관광객을 바라보는 그런 무심함이 있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놈의 생계를 의식하니 이 도시가 점차 내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궂은 날씨가 지긋지긋했던지 어머니는 흙빛으로 물든 센 강을 바라보며 한마디 하셨다. '왜 쟤들은 우산도 안 쓰고 다닌다니.' 나이 지긋한 노인부터 젊은 친구들까지 우산을 쓰는 법이 없다는 걸 어머니는 신기해하셨다. '그거야 파리니까. 파리지앵이랑 우산은 안 어울리잖아' 파리에서만큼은 뭐든 척척 대답할 줄 알아야 했던 잘난 아들도 그 답을 모른다. '저러니 냄새가 나지. 아 그래서 향수 산업이 발달했나 봐.' 지천으로 깔린 개똥을 피하려고 하이힐을 신기 시작했다던 파리 시민이라면 그럴 수 있지. 근처 마트에서 5유로짜리 3단 접이 우산을 냉큼 사서 어머니를 향해 펴들었다.


 광화문역 근처에 내려 우산을 펴니 여행 당시 파리에서 샀던 녹슨 우산이었다. 기억은 미화된다더니 이 우산을 보며 다시 파리 시내를 그리워한다. 오늘 서울 하늘은 흐림과 우중충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괜스레 멜랑꼴리 한 기분에 젖어 귀에 꽂은 이어폰 볼륨을 높였다. 평소 하던 대로 광화문 시네 큐브에서 영화 한 편을 예약하고 근처 스타벅스에 둥지를 틀었다. 평소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들이켜도 기분은 나지지 않았다. 두껍게 양장 된 책을 사면 기분이 나질까 싶어 근처 교보문고로 갔다. 새로운 판형으로 출간된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집어 들고 전에 읽던 지점부터 읽기 시작했다. 소세키(욕 같네) 특유의 단문을 읽으며 마음을 아늑하게 하고 싶었다. 근데 막상 읽다 보니 내용이 너무 염세적이라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삶과 소설을 동일시했던 일본의 사소설 작가들은 과연 오늘처럼 비 오는 날씨를 좋아했을까. 그들은 늘 초여름의 비 오는 창밖 풍경을 배경으로 글을 쓴다. 일이 없어 한량을 자처하는 그들은 맘에도 없는 죽음을 떠올린다. 서점에서는 내 기분에 맞춰 ‘콜 포터’의 피아노곡을 틀어준다. “Lets do it, Lets fall in love.” 그래 비는 와도 사랑은 해야지 죽긴 왜 죽어.

작가의 이전글 마지막 축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