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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05. 2019

없음을 내밀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저

여느 때랑 다름없이 동네를 걷는데 거리가 황량하게 느껴졌다. 근처 서점에 들어가서 실내를 둘러봐도 도통 인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한적하길 바라며 외출했건만, 막상 텅 비어 있으니 섭섭하기 그지없다. 행인을 구경할 수 없어 지루하고, 나를 봐줄 사람이 없어 신경이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저만치 고개를 숙인 서점 직원은 날 외면하기 바쁘다. 뭘 하나 까치발을 들고 목을 쭉 빼고 봤더니 뿅뿅뿅 게임 중이다. 가방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책을 꺼내놨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책을 읽으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똑똑 소리가 멍히 울렸다. 

 커피를 좀 마시다가 발제를 적고 공원으로 향했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주위를 둘러보니 빌딩들이 저마다 불을 켜놓고 서 있다. 층마다 무수한 창문들이 빛을 내뿜는다. 가끔 버릇하듯 사무실 내에서 어떤 일을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의 가정과 그의 과거 그리고 그가 잃어버린 누군가에 관해. 난 그게 못마땅해 마치 어둠을 흡수하는 것처럼 음습한 공원에 더 머물렀다. 이게 소설의 여파인가. 난 소설을 덮고 나면 여진에 시달린다. 지독히 외로운 기 롤랑에 빙의했다. 그 시간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심심해서 카톡을 켰다. 친구 리스트를 스르륵 내리니 무수한 근황이 스친다. 누군가의 프로필을 눌렀다.

 친구의 사진이 보인다. 녀석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녀석의 마지막 기억은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일요일 정오다. 유난히 궂은 날씨에 우린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눴다. 그 후론 녀석이 구직에 바빠지며 연락이 뜸해졌다. 그때 무슨 얘기를 했었나. 기억이 캄캄하다. 아마도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어떤 얘기를 나눠도 괜찮을 만큼 편안한 사람이었으니까. 녀석은 따분한 말도 신선하게 할 줄 아는 재주가 있었다. 인상적인 기억은 없지만, 우리 둘 사이에 놓인 공기가 또렷하다. 그의 맑은 눈과 호기로운 말투가 좋았다. 나와 정반대에 선 사람을 향한 호감도 있었다. 이제는 희미한 기억이라 제스처만 남았다. 아니 내 카톡에만 남겨졌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두 시간쯤 지나 헤어지려 했다. 알맹이 없는 대화가 슬슬 지겨워진 참이었다. 근데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주섬주섬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뜬금없게도 앙증맞은 선물상자였다. 난 그게 그렇게 이상하게 보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 웃는데 녀석은 설핏 미소만 지었다. 시간이 지나도 별말이 없었다. 난 왜 이런 걸 주냐고 물었지만, 녀석은 그냥 생각나서 샀다고 짧게 답했다. 난 그 선물상자를 얼마나 지니고 있다가 버렸던가. 별거 아니었기에 선물은 쉽게 달아났다. 그게 뭐였더라.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상자 모양만 또렷이 생각난다. 어디 아트박스에서라도 샀는지 색이 분홍분홍했다. 

 공원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엉덩이가 시리고 바람이 매서웠다. 나만 여기 홀로 우두커니 남겨졌다. 우선 어디든 들어가자. 프로필 사진으로 본 녀석은 행복해 보인다. 작고 귀여운 아이를 품고 누구보다 환히 웃는다. 한때는 꽤 각별했는데 지금은 톡 하나 남기기도 겸연쩍다. 

 기 롤랑은 큰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한동안 고생했다. 정신착란과 환영을 보는 증상까지 있어 가족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고 들었다. 녀석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춰 모두를 놀라게 했는데, 놀랍게도 아무도 모르게 프랑스 파리에서 머물렀다. 지독한 독서광이었던 기 씨는 유독 프랑스 소설을 좋아했다. 그때 이름도 프랑스식으로 바꿨는데 모두 그걸 우스꽝스럽게 여겼다. 그는 자신의 사라진 과거를 찾겠다며 온 파리 시내를 들쑤시고 다녔다. 어디에 취직했는지 탐정 명함을 만들어서 돌렸다. 그래봤자 흥신소 직원이면서. 그는 쉽사리 자신의 꽁무니를 찾지 못했다. 대신 기롤랑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기질답게 문학을 통해 자기를 환영처럼 그려냈다. 텅 빈 그의 머릿속은 소설처럼 변해갔다. 

 기롤랑의 글은 느슨하고 파편처럼 흩어져 있어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쩐지 처연하고 어딘지 모르게 스산해 날 매혹시켰다. 비틀스의 엘리노어 릭비의 후렴구가 떠올랐다. 저 외로운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요. 저 외로운 사람들은 대체 다 어디에서 왔을까요. 낡은 빅토리아풍 탁자, 차갑게 식어가는 찻잔, 낡은 소가죽 구두, 알싸함만 맴도는 거리와 네온 불빛의 아스라함이 요즘도 날 따라다닌다. 이 책을 읽은 게 언제인데 난 기 롤랑을 종종 떠올린다. 카톡 리스트에 있는 무수한 얼굴들 속에서 기 롤랑을 본다. 등불처럼 사라지는 스쳐 간 사람들. 기롤랑은 자신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이들에게 자신에 관해 묻는다. 어제는 해변을 거니는 무수한 사람 중 하나가 되어버린 그 남자를 가늠한다. 어디에도 남지 못하고 오로지 누군가의 사진 한 장에 박제되어 버린 여린 한 토막의 영혼.

 가끔 일요일 오후에 혼곤히 남잠을 자다가 깨어나면 마음이 처연해진다. 불을 켜지 않은 컴컴한 거실에서 소파에 누워 밖을 응시하면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기분이 든다. 감상에 빠져서는 접영을 치는 꼴이다. 더 나아가, 내가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속상하다. 아이 같은 생각이지만 괜히 의기소침해져서 투정을 부리고 싶어 진다. 반쯤 지워진 내 흔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몰라 불안해한다. 항상 뭔가를 적으며 기억해 내려 애쓰지만 결국 기억의 가장자리에 머문다. 기억의 손잡이 정도지 몸통은 사라지고 스러졌다. 굽은 등으로 적고 지우기를 반복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글을 쓸 땐 종종 누락이 주는 상상에 의지한다. 부재는 일종의 가능성처럼 주위로 쏟아진다. 난 그걸 어렵사리 주워 가능성 없는 낙원을 적는다. 기억이 지워진 만큼 뭔가를 글로 잔뜩 채워놓았다. 열심히 쌓았다가 부수길 반복한다. 기롤랑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벌써 나의 삶을 다 살았고 이제는 어느 토요일 저녁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떠돌고 있는 유령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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