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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20. 2016

낙원을 그린 화가 '폴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전시회, 영화 <코파카바나>

주말에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전시회를 다녀왔다. 그의 작품 중 3대 걸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서울시립미술관을 통해 전시되고 있다는 광고 문구가 눈에 띄었다. 한주밖에 남지 않았다며 재촉하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급히 지하철을 탔지만 막상 미술관 즈음에 다다르자 '그게 뭐?' 정도의 감흥밖에 일지 않았다. 난 미술관에 자주 다니지 않는다. 영화는 아닐 수도 있지만, 미술만큼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생각한다. 미술 역사에 대한 기초지식 없이  팝아트나 레디메이드, 액션페인팅을 보며 예술적 가치를 찾을 순 없다. 현대미술이 인상주의부터 어떤 방식으로 변모해왔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느 한 미술가의 작품을 보며 그 속에 담긴 예술성을 논하기란 불가능하다. 맥락이 없이 멍하게 쳐다보는 그림만큼 지루한 건 없다. 그래서 결국엔 어느 작가의 대표작을 바라보며 이게 얼마짜리 줄 아느냐며 공허한 말들만 늘어놓는다.

마르셀 뒤샹, 샘(Fountain, 1917)

1917년 작가 '마르셀 뒤샹'이 동네에서 구입한 소변기를 샘(Fountain)이라 명명했을 때 이것은 예술이 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뒤샹이 소변기에 녹여낸 현대 예술에서의 의의를 레디메이드라는 미술사조를 통해 이해한다면 소변기에서 뭔가 보인다. 거기엔 후기 인상주의 화가 세잔의 표현주의와 입체화가 피카소와 추상성이 같이 딸려 나오는 개념이다. 거기에 전쟁과 대량생산이 예술계에 미친 영향까지 이해한다면 소변기가 샘으로 추승된다. 폴 고갱 전시회의 작품들 역시 화려한 색감의 원시주의, 친구 반 고흐와 일화들을 통해 우리가 아는 기존 지식을 짜깁기 해서 무언가 이해하려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물론 고갱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몇 개의 작품을 제외하곤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만 부지런히 흡수했다. 현대미술의 문턱은 내겐 너무 높고, 아담한 덕수궁 옆에 자리한 서울 시립미술관의 고적한 아름다움과는 달리 현대미술을 접하는 내 머린 더 복잡해졌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점

막상 서울시립미술관에 다다르니 공기도 쾌청하고, 덕수궁 돌담길의 아늑함 역시 즐길만하다. 관람객은 어찌나 또 많은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폴 고갱의 그림을 이렇게 사랑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저 나처럼 얼마 안 남았다는 말에 혹해서 그냥 따라온 뜨내기들도 보였다. 어김없이 주말이면 찌푸린 표정을 짓는 이 시대의 가장들은 주말에 가족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다는 구실 정도로 전시회 복도에서 허공을 응시했고, 입시 준비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은 그림이 가진 화법에 집중하며 전공서적이 끝내 이해시키지 못한 작품의 형형함을 꿰뚫어 보았다. 칭얼거리는 아기들에게 침을 튀기며 짧은 지식을 전달하는 어머님의 열정적인 모습 비장함이 서려있었다. 미술관에는 그렇게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폴 고갱이 창조한 이 화려한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들로 들끓고 있었다.

폴 고갱은 생전에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철저하게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했다. 좀 더 쾌한 삶을 위해, 향락의 가치를 쫓아 그림을 그리고 또 팔았다. 하지만 유구한 세월이 지나 그의 그림들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아시아의 작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걸리고 있다. 그림이라는 프레임이 가진 미술적 가치에 늘 탄복하게 되는 건 바로 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생명력이다. 그림을 보며 폴 고갱이라는 남자가 어떤 화실에서 무슨 자세로 이 그림을 그렸을지 상상하고 떠올려보았다.

황색의 그리스도(1889), 폴 고갱

미술에서 화가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그림 속 상징들을 해석해 스토리를 떠올리는 작업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영화와 문학은 스토리라는 뼈대 위에 작가들이 가진 기질을 서사 위에 뿌려 넣는다. 하지만 그에 반해 미술이라는 프레임은 간접적인 상상을 통해 화가의 처지와 시대상황을 추측해서 이해했을 때 비로써 그림이 살아 움직인다. 폴 고갱 전시를 볼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은 인생 연표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의 속내를 유추해내는 과정이다.  

폴 고갱의 인생은 극적인 순간들이 많아 그림을 즐기는데 큰 영향을 준다. 그중에서도 친구 ‘빈센트 반 고흐’와의 일화들은 여러모로 그를 알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낼 때 같이 있었던 유일한 친구가 고갱이었기 때문이다. 남태평양의 그림 같은 섬 타히티에서 밝고 강렬한 색채의 그림을 그려낸 천재 작가. 하지만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점점 더 미쳐갈 때, 유유히 섬을 떠나 혼자만의 성공을 갈망했던 실패한 화가다. 고갱은 자식을 셋이나 낳고도 아내를 버리고 섬으로 떠난 무책임한 가장이었고, 돈 많은 테오의 지원을 받기 위해 맘에도 없이 미친놈 반 고흐를 가까이한 기회주의자였다. 또한 예술적으로도 넘치는 창작욕에 다수의 그림을 그렸지만, 결국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낙오자였다.

폴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1892)

 가난 속에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천착했던 인상주의를 매몰차게 버릴 만큼 야욕에 쩐 인물이었다. 특히 타히티 섬에서는 어린 소녀들과 성에 탐닉해 매독에 걸려 고생하며 말련에 추해졌다. 예술가의 아우라는 미미하고 인생 이력으로 봤을 때 실패자가 더 어울리는 족적을 남겼다. 때로는 종교적으로 지나치게 천착해 보이는 그의 몇몇 그림들에서 화려한 색감과는 정반대의 절망적인 기운을 읽어내기도 한다.

사실 폴 고갱의 인생이 순탄치 않았던 것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이 발현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고갱은 나름 유명한 정치부 기자의 아들로 유복하게 자랐고,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페루로 도망가는 등 시대를 읽고 빠르게 변화하는 남자였다. 해군 장교로 복무할 만큼 엘리트 한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이후에는 증권사 직원으로 돈을 벌만큼 벌어 아쉬울 것 없는 20대를 보낸다. 당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고갱은 그림을 수집하고 예술적 취향을 즐기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남자였다. 그의 작품들은 빛나는 그의 재능과 더불어 다수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고 점점 더 생계와 가정을 소홀히 하게 한다. 내 친삼촌이 바둑에 빠져 대학도 그만두고 기원을 다니면서 인생이 망가졌던 것처럼. 고갱 역시 그림을 그리면서 살롱을 찾아 수많은 위대한 화가들을 만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생계가 어려워진 고갱은 아내는 그와 별거하고,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갔다. 그의 나이 35살이다. 예술이 한 성공한 남자의 인생을 뒤틀어놨고, 그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에게 미술이란 삶을 입체적으로 주조하는 해방구였고, 점점 더 현실 탈피의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그는 파나마로 떠나는 배 안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수년 후 피폐한 몰골로 귀환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가는가?(1897)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한 영화 <코파카바나>는 음악과 춤을 사랑하고, 사랑에 쿨하며, 언제나 삶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바부’(이자벨 위페르)라는 여인에 관한 영화다. 그녀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정의로운 사람이고, 하나뿐인 딸 앞에서는 지극히 약해지는 다정한 엄마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라면 현실에 대한 인식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자유로운 영혼들이 그러하듯 그녀는 현실감이 떨어져 자연스레 경제적으로 궁핍하기에 이르고,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히피 같은 옷차림을 하고 다른 이의 눈치에 아랑곳없이 인생을 그저 즐길 뿐이다. 모두가 그렇게 즐거우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의 사람들은 돈 많은 남자와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 평범하게 살고 싶은 보통사람들이다. 바부의 딸 에스메랄다는 대책 없는 엄마가 부끄러워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고, 결국엔 엄마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만다. 그저 열정적으로 즐기며 인생을 살았던 바부는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벽에 부딪치고, 딸의 결혼식에도 초대를 못 받아 벨기에로 도망치듯 떠나간다.

코파카바나Copacabana, 2010

누구나 가혹한 상황이 눈 앞에 닥치면 떠나고 싶어 한다. 뒤늦게 자신의 예술적인 열정을 발견해 처자식을 버리고 낙원을 찾아간 고갱도 그렇고 갈등이 사라진 이상적인 코파카바나를 그리는 바부 역시 그럴 것이다. 영화에서는 유일한 가족인 딸을 위해 벨기에로 떠난 것과 다르게 현실 속 폴 고갱은 자신의 현실을 모두 방치한 체 도주했다. 심지어 폴 고갱은 젊은 나이에 쓸쓸히 독한 병에 걸려 초라하게 객사한다. 현실이 영화와 현저한 차이를 표출하는 지점이 바로 갈등을 대하는 예술인의 태도다. 역사가 고갱의 작품을 어떤 가치 위에 올려놓고 평가하는 것과 별개로 한 사람의 인생에서 복구 불가능한 상처를 봤을 때 숙연해진다.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고갱의 그림들이 점점 더 처연한 무엇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 미술관은 더 이상 낙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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