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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22. 2016

잠이 없는 여자, 소설 같은 남자

신연식 감독의 영화 <러시안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 중편 소설 <잠>

여유시간이 나면 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영화를 본다. 평소 괜찮다고 소문난 미드나 TV 프로그램을 몰아서 보기도 하지만, 어김없이 나의 관심사는 영화다. 우선 영화관을 찾아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몸이 긴장되고 뻣뻣하여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에도 영화관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한 숨을 내쉬면 몸이 풀린다. 시네마의 세계 그 자체가 내게 평온한 세상이다. 영화의 효능은 몇 가지 알려져 있듯 내게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물론 영화를 킬링타임으로 본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가끔 무언가를 잊기 위해 영화를 찾는 시간을 부정할 순 없다. 난 때때로 잊고 싶은 기억이 내 머리를 좀먹고 있을 때, 영화를 통해 기분전환이란 걸 한다. 몰입을 통한 현실 부정이라니 애 같지만 다들 그런 이유로 술도 먹고 게임도 하고 그런 거 아닌가 싶다. 그렇게 영화로 시간을 때운 후에는 별거 아니었군 하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

러브레터 Love Letter, 1995

중학생 땐 책을 더 좋아했다. 당시 평촌중학교 사서 선생님은 여자 처녀 선생님이었고, 책은 자연스럽게 내 취미가 되었다. 당시 러브레터가 개봉하여 이와이 슌지 현상이 전국적으로 괴장할 때라 더욱 그랬다. 영호 속에서 첫 사랑을 도서관에서 만나 대여카드를 통해 서로의 흔적을 확인하는 로맨틱한 상상이 도서관을 낭만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방과 후 빠지지 않고 비좁은 학교 도서관에서 사서 선생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책을 읽었다. 더딘 책장을 넘기면서 졸음을 참지 못해 엎어져 잤지만, 끝내 책을 다 읽었던 것 같다. 그때 처음 문학이라는 세상을 접하게 되었다. 모두가 빠져나간 학교 안에서 난 이야기의 낙원에 빠져 현실에서 도피하길 즐겼다. 당시엔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영화나 문학이나 그런 면에서  나와 세상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20대 준반 취직한 후부터 책보다는 영화가 더 좋아졌다. 이것저것 일상에서 챙길 것들이 많아지면서 처음으로 책을 읽는 게 피곤하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싫어진 것은 아니니 쉽고 빠른 영화에 의지했던 것이다. 영화가 문학보다 하등의 매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활자가 주는 삶의 활력을 잊고 사는 현재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다. 꾸준히 한 달에 한 두 권은 꾸역꾸역 읽지만, 끝내 두꺼운 고전문학을 가까이 하진 못한다. 왠지 모르게 문학 주위에서 겉핥기를 하는 기분만 든다고나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중편소설 <잠>

얼마 전 프랑스에서 개정 발간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중편 소설 <잠>을 읽었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삽입하여 하루키 소설만이 가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표현한 표지가 인상적이다. 다만 중편소설 한 가지만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하루 만에 다 읽어버리는 단점이 있을 뿐. <잠>은 한 가정주부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잠을 못 잔 지 십칠 일째다.” 어느 날 갑자기 잠을 자지 못하게 된 한 가정주부는 새벽에 술 한 잔 하면서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시작한다. 하루키는 인간의 생에 삼할 이상을 차지하는 잠이라는 세계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서문에서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이 작품은 무심한 남편과 잘 커가는 아이들을 둔 권태기의 가정주부가 갑자기 불면증이 걸리게 되면서 남아도는 일상을 어떻게 때울 것인가를 풀어낸 이야기다. 잠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을 지극히 하루키적 문학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잠이 없는 그녀가 택한 것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라는 사실. 그리고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며 뭔가 달라진 삶을 마주한다는 문학에 대한 애착이 이 짧은 소설을 특별하게 한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수영을 하고, 문학을 섭취하는 주인공 그녀의 일상은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것이다. 더 황홀한 점은 남들 다 자는 고요의 시간에 밀크 초콜릿을 먹으며 책을 보는 기쁨이란 말해 무엇하랴. 하루키는 이 소설을 자신이 개인적인 욕망의 투영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그가 늘 자신의 자의식을 투영하여 고양이, 두부, 맥주, 야구, 달리기 등을 소설 속에 노출한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브랜디 한 잔과 밀크 초콜릿을 꺾어 먹으며 러시아 문학 속에서 새벽을 보내는 모습은 너무도 하루키적 아니던가. 이 작품의 집필 당시 하루키는 개인의 커리어에서 가장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로마의 후미진 골목에 방을 잡고 오로지 이야기 집필에 몰두한 그는 자기 자신을 소설 속의 잠이 없는 그녀, 문학에 빠진 그로 녹여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이야기 속으로 귀의할 수 있다면 더 큰 행복이 없을 테니까.


영화 러시안 소설 The Russian Novel, 2012

갑자기 하루키의 <잠>을 읽고 나니 신연식 감독의 <러시안 소설>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영화에서 한 소설가의 딸은 성환이라는 청년을 향해 "오빠는 ‘러시안 소설’ 같다"라고 말을 한다. 느리고, 게으르고, 복잡한. 혹은 길고 등장인물이 많은. ‘러시안 소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영화가 러시안 소설처럼 다채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문학의 아름다움을 끊임없는 묘사들로 추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신연식 감독의 일종의 문학에 대한 자기고백적 성격이 짙다. 러시아 소설 같은 남자, 러시아 문학 같은 이야기. 이 영화가 표현의 확장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짚고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적어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문학과 서사 그리고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주는 매혹을 온전하게 영화화했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 러시안 소설 The Russian Novel, 2012

이 영화에선 소설의 일부분이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문학의 본질을 찾기 위한 시간여행은 지속된다. 마치 안나 카레니나와 춤을 추는 브론스키의 격정적인 마음처럼 말로 설명하기 힘든 매혹이 가득한 영화다. 문장을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며 어간 사이에서 숨어 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구는 나처럼 작은 방에서 작은 불빛을 앞에 두고 두꺼운 문학 책을 읽으며 삶을 위로하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기는 기분이다. 외로운 타지에서 잠은 안 자고 톨스토이를 생각하는 그녀, 27년 만에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기원을 문학에서 찾으려는 러시안 소설 같은 남자, 문학적 상징을 낚으러 세상을 헤매는 낚시꾼까지. 난 오늘 교보문고를 가서 중학교 때 포기했던 안나 카레니나 양장본을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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