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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22. 2016

그들 나름대로의 도서관

북유럽에서 한국 그리고 시칠리아까지, 그들의 독서공간

스웨덴의 도서관

북유럽 사람들은 독서량이 많기로 유명하다.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전 3권)를 읽다가 스웨덴의 독서문화를 엿본 적이 있었다. 유럽연합 27개국의 15세 이상을 대상으로 유럽위원회가 조사한 ‘유로바로미터-유럽의 문화활동’ 2013년 보고서에 따르면 스웨덴 국민의 연평균 독서율은 90%로 세계 1위다. 전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다는 복지의 천국 스웨덴의 이미지는 일종의 얼음 낙원이다. 하지만 밀레니엄 시리즈를 다 읽고 나면 이 범죄소설이 스웨덴이라는 스칸디나비아의 공화국을 다르게 보게 한다. 소설을 통해 내가 모르던 곳의 절단면을 훔쳐본 것이다.
스웨덴은 오후 네 시만 되면 컴컴해진다. 하늘에 오로라가 보일 정도로 맑은 하늘을 가졌지만, 온 세상이 얼어붙을 정도의 추운 날씨에 걷기 힘들 정도다. 그러다 보니 몰아치는 눈발이 사람들을 실내로 몰아넣는다. 대지가 넓어 집들은 으리으리하기가 대책이 없을 정도여서 식사시간 외 가족과 마주칠 일이 없다. 이렇다 보니 그들은 날만 어두워지면 담요를 몸에 끌어 앉고 소설을 읽는다. 피가 튀고, 갈등이 난무하는 뜨거운 범죄소설을 읽으며 살과 살이 부딪치는 정경을 상상한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모습이다. 그들이 평화로운 세상 속 방구석 안에서 온갖 사람들 사이의 마찰을 꿈꾸는 것이다. 그것이 범죄와 섹스라면 더 좋을 게 없다. 스웨덴의 상황이 높은 물가로 여흥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고, 수도세가 금보다 비싸다는 농담을 한다. 고독이란 심상을 일종의 국기처럼 지닌 나라다. 범죄소설은 인구 밀집도 가 높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개싸움이다. 그들은 문만 열면 새로운 사람이 시비를 걸어오는 한국을 비롯한 영미권의 도시를 선망할지도 모를 일이다. 

Stockholm Public Library, 스웨덴

우연히 스웨덴의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의 정경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1928년 건립된 이 공공 도서관엔 많은 사람들이 책 속에 둘러싸여 저렴한 취미 수단인 독서를 택한다. 속된 것이 지나치게 없는 나라에서 속된 것을 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 책이라는 길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스톡홀름에는 공공 도서관이 43개나 된다.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복지혜택 중 하나인 도서관은 하나같이 거대하다 못해 지나치다. 시민들은 독서클럽을 중심으로 퇴근길에 이곳에 모여 책에 관한 수많은 담론을 쌓아간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그리고 유튜브와 페이스북의 재미를 깨달은 젊은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 추운 나라에서  움직이지 않는 아이패드인 문학책을 찾는다는 기적에 난 마음이 놓인다. 책 한 권 찾지 않는 한국에 살며 난 스웨덴의 사람들을 상상한다. 북유럽의 겨울 소년들이 두꺼운 양장본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는 한국의 은희경, 김영하 같은 소설가의 책을 읽으며 한국이라는 나라를 떠올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아마 그들은 미국 IT의 상징인 애플과 페이스북이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기업임을 추측조차 못할 것이다. 

은희경 <새의 선물>

은희경 새의 선물, 삼촌의 방

개인적으론 소설을 늘 카페에서 읽는다. 스톡홀름이 도서관의 천국이라면, 서울을 카페를 위한 도시다. 세계에서 스타벅스가 가장 많은 도시이고, 카페의 노트북 사용자들이 수면 이외에 모든 걸 할 수 있는 곳이 카페다.(가끔 엎드려서 처 자기도 한다.) 나 역시 지금 카페에서 이 글을 두드리며 블로그를 하고 있지만, 주로 하는 건 독서다. 카페는 적당한 소음과 잡스러운 음악소리가 잘 어우러져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다. 오늘 읽은 책은 은희경의 처녀작 새의 선물이다.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 속 12살 진희는 힘겨운 69년을 보내는 중이다. 전 세계가 혁명의 광풍에 몸을 맡길 때 한국의 소읍 마을에 사는 진희는 유지 공장에서 나는 역겨운 기름 냄새를 이겨내며 소설을 읽고 있다. 서울대에 간 큰삼촌이 남긴 책들은 퀴퀴한 냄새를 풍기지만, 한 청년의 인생을 구제해 준 공로를 진희도 역시 느끼는 중이다. 작은 마을의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세상의 큰 관념에 다가서는 기회를 준 이 책들이 진희에게는 거의 전부이다. 또한 책의 제목인 <새의 선물>처럼 진희의 인생과 동떨어진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찍이 내면을 숨기고 세상이 요구하는 아이가 되기로 한 진희는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말하는 소녀다. 그녀는 은희경 소설 세계의 모체가 된 캐릭터다. 멀찍이서 자신이 분리해 낸 자아가 세상의 돌아가는 꼴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진희의 독서는 늘 방과 후 나른한 오후에 어두운 방 안에서 이루어지다. 독서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고독의 영역임을 잘 알고 있는 은희경이 캐릭터에 보내는 애정과 같은 시간이다. 마치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의 '마르코 스탠리 포그'처럼 책과 일상이 하나가 되어 돌아가는 유기체. 진희와 포그 사이에 놓인 간극을 넘어서 책이라는 선물이 삼촌이라는 사람을 통해 그들에게 도착함에 있어서 두 작품은 공명한다. 사람마다 스스로 예민하다고 느끼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나에겐 외로움을 넘어선 고독이 있는 것 같다.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게 힘겨운 것이 아니다. 고독은 스스로 혼자 무언가를 즐길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그 외로움을 자양분 삼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얻어내는 일. 그것이 꽤 익숙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진희와 포그 역시 어두운 방안에 음악을 켜고, 백혈구 아래서 책을 들추는 짓들을 귀히 여긴다. 

어제 본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엔 시칠리아에서 혼자 사는 '안나'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큰 저택에 컴컴한 방들엔 누군가의 자취조차 없다. 그런 집에 아들 주세페의 여자 친구인 '잔'이 찾아온다.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는 잔을 통해 아들의 개인적 연애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영화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 주세페를 등지고, 텅 빈 집을 홀로 지키는 안나를 지켜보며 끝이 난다. 주세페의 죽음과 잔의 도피 이 모든 것이 그녀가 홀로 되기 위한 조건일 뿐이었다. 이제 홀로 남겨진 안나의 얼굴에는 고독이 아닌 기다림의 고통이 남겨져있다. 아들이 부재한 방에 울리는 우탱 과격한 래 가사들. 잎이 없는 나무와 창밖으로 비치는 시칠리아 특유의 시끄러운 소리들까지 모두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영화는 고독을 위해 마련한 성찬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그녀의 책장엔 어떤 책이 꽂혀 있을까. 그녀는 욕조 안에서 어떤 페이지를 읽고 있으려나. 줄리엣 비노쉬의 텅 빈 얼굴이 가시질 않는다. 혼자된 텅 빈 집에 문학이 없다면 무엇이 그녀를 구해줄 수 있으려나.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L'attesa, The Wait, 2015

소설 <새의 선물>의 마지막엔 성년이 되어 이제는 서른을 넘어선 진희의 삶을 비춘다. 그녀의 서른이라면 이제 막 90년대에 들어서 문민정부와 자본주의가 가져온 화려한 도시의 삶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여전히 진희는 낯선 남자와 방 안에 있다. 이제 삼촌이 아닌 그녀와 사귀는 남자의 방이다. 그녀는 우리의 기대처럼 화려한 삶을 살지도, 성공한 사회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녀는 자신과 몸을 섞은 한 남자를 낯설게 느끼고 있다. 욕망의 배출에 서두르며, 속으로 되내는 버릇을 멈추지 못한다. 여전히 삶은 태연하게 그녀와 함께한다. 12살 이후론 성장을 하지 못한 그녀는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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