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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22. 2016

혼밥족의 일상

소설 <백의 그림자> (황정은 저) 그리고 영화 '용의자 X의 헌신'

혼밥족의 삶

몇 년 전까지 회사에서 지급되는 오래된 원룸에서 5년 넘게 살았었다. 허름한 시설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에 만원이라는 공짜와 다름없는 방세와 직장과 5분 거리라는 편리함에 그냥 살았다. 사실 서울에서 원룸 잡고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은 한 달에 40만 원을 방세에 날리고 있으니 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종종 사무치게 집 밥이 그리워진다거나, 먹고 싶은 것을 요리해 먹기 힘들 땐 좀 힘들었다. 잠이야 피곤하면 자빠져 자면 되는 것이고, 추위야 싸매고 있으면 너끈히 해결된다지만 허기진 배는 사람을 처절하게 한다. 숙소가 구석진 곳에 있다 보니 가까운 김밥천국에 가려고 해도 10분은 차를 몰고 나가야 했다. 한번 나가면 아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 한잔해야지 하며 4000원짜리 커피를 덥석 손에 쥐고는 어머니의 밥상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가끔은 장을 봐와 작은 냄비에 조악한 요리를 하기도 한다. 요리법이야 인터넷에 널리고 널렸으니 대충 따라 한다. 혼자 요리를 해서 먹어봤자 맛있을 리가 없음에도 집 밥이 그리우니 어쩔 수 없다. 요리를 하다 보면 아 이렇게까지 일 인분의 양을 시간 들여한다는 것이 허무해진다. 그냥 나가서 사 먹으면 설거지할 일도 없잖아 괜한 소리를 중얼거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쉰다. 혼잣말로 음음 흐음 소리를 내며 맛있는 추임새를 내고 먹어도 김 빠진 사이다처럼 맨송맨송한 식사를 하고 만다. 웰빙 열풍이 한국을 강타할 때 냉동실에 쟁여뒀던 닭 가슴살도 비싼 드레싱 소스와 함께 썩어가고 있다. 유통기간이 다 된 닭가슴살은 결국 쓰레기통으로 향했고, 길 고양이들의 밥이 되었다.

용의자 X의 헌신 2006, 히가시노 게이고 저 | 현대문학

소설 <용의자 X의 헌신>, 그녀의 도시락

요즘은 그래서 배달되는 도시락 가게를 애용한다. '할머니 도시락'이라고 간판을 건 이 가게는 다행히 나 같은 혼밥족을 위해 맨송맨송한 밥에 영양에 좋은 야채를 제공한다. 몸에 좋은 나물과 생선도 가끔 나와서 내심 만족하고 있다. 보통 도시락이 배달되면 야구 중계나 <라디오스타>, <썰전> 같은 TV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해 보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장어 튀김이 반찬으로 나왔는데, 밥을 먹으며 읽던 소설에 도시락에 대한 재밌는 대목이 있어 적어본다.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 일부분이다. 고등학교 수학선생인 이시가미는 좋아하는 여자 야스코가 근무하는 '벤데데이 도시락'에 매일 아침마다 들러 '오늘의 도시락'을 산다. 벤또는 일본 개인주의 상징이다. 근무지에서 이시가미는 그녀가 차려준 하나의 식탁을 앞에 두고 그녀의 사랑을 느낀다. 사랑하는 여인이 만든 도시락을 먹으며 그녀를 떠올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오늘의 도시락의 주된 메뉴는 장어 튀김정식이다. 이 장면이 웃픈 이유는 그녀가 싸준 도시락은 그녀가 파는 도시락집의 메뉴일 뿐이고, 그는 그저 단골손님인데 도시락에서 특별한 애정을 읽는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 나도 밥을 먹으며 거울 속의 나를 비춰봤는데, 이시가미의 초라한 행색이나 비루한 표정까지 나랑 많이 닮아 보였다. 아 혼자 오래 살면 저런 얼굴을 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밥을 차려주는 누군갈 만나면 저렇게 빨려 들어가는구나 순간 섬뜩했다. 영화 속 이시가미는 사랑하는 여자 야스코를 지켜내기 위해 살인범의 누명까지 뒤집어쓴다. 밥 차려주는 여자를 위해 미친 짓까지 서슴지 않는 이시가미 정말 무섭다. 생각해보라 혼자 사는 자신에게 장어 튀김과 같은 고급 스킬의 요리를 매일 아침 제공해주는 여자는 생명의 은인과 다를 바 없다. 더 나아가 남자는 자신에게 밥을 차려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말에 긍정하게 한다. 

백의 그림자 , 황정은 저 | 민음사

황정은이라는 귀한 작가,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

여기까지 나의 헛소리를 그만하고, 요즘 같은 출판 불황기에 눈에 띄는 '황정은'이라는 작가를 소개하려 한다. 유난히 마니아층이 두터운 작가다. 재밌는 이야기라면 가리지 않고 읽어 내려가는 나 같은 소설 중독자는 이렇게 두터운 문학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백의 그림자> 소설의 배경은 도심 한 복판의 사십 년 된 전자상가다. 이제 철거될 철거되기 직전의 공간이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면 세운상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상가를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은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도시계획의 거대함에 순응한다. 이런 곳에서도 젊은 두 남녀는 사랑에 빠진다. 무재와 은교, 두 사람은 철거예정지에서 서로를 아낀다. 마치 도시와 벽을 치듯 그들의 데이트는 소박함을 넘어선 초현실적인 분위기까지 풍긴다. 장을 봐서 메밀국수를 만들어 먹고, 어느 낯선 섬에서 조개구이를 실컷 먹기도 하는 두 사람의 연애. 숲 속의 공기처럼 무공해의 정서가 담긴 이야기다. 황정은 작가는 모두가 가진 그림자를 본인들의 자의식으로 설정하고, 그림자가 일어난다는 표현을 통해 도시 속 소멸의 느낌을 표출한다. 서로를 사랑하게 된 은교와 무재는 그저 밥을 차려주고, 같이 먹는다는 행위만으로 위로를 느낀다. 슬럼이라는 말로 이 낡은 대지를 팽개치는 사람들에게 먹고살고 사랑하는 그들을 보여주고 싶다. 뉴타운이라는 말로 재편할 수 없는 정서도 있다. 자본주의라는 사회 시스템이 도시 속에서 인간다움을 갉아내고 있음에 황정은 작가는 매번의 작품마다 특정한 은유를 통해 불만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그곳에 엄연히 정착해서 삶을 지탱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든든한 저녁식사 한 끼를 통해 자신들의 건재함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백반 한 가지만 파는 허름한 가게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분명 삶이라는 생계가 두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고 있다. 도시는 그것을 잊을 수 없다.


“은교 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는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계란 먹을래요? 네.”


같이 걷고, 배드민턴을 치고, 자취방에서 국수를 삶고, 고물 자동차를 타고 ‘맑고 개운한 국물’을 먹으러 떠나는 여행이다. 특별한 것 없는 무덤덤한 데이트에 서로의 그림자는 곤두선다. 평일 저녁은 거의 매일 혼자 밥을 먹는 나에게 먹고 있음으로 자신을 증명해내는 황정은이라는 세계가 얼마나 애틋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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