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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16. 2016

부산영화제와 블루 재스민

21회를 맞아 독립한 부산영화제의 미래를 기원하며

난 1박 2일이 넘어가는 여행을 선호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 하루짜리 여행지를 찾는다. 이유는 집에서 자고 싶기 때문이다. 난 낯선 곳의 잠자리와 화장실을 꺼린다. 잠이 잘 오지 않고, 화장실이 바뀌면 없던 변비가 찾아온다. 그래서 난 거의 대부분 서울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한다. 지하철을 타고 새벽 1시에 돌아와 잠을 청할 수 있는 정도가 내게 최대치의 여행시간이다. 난 동네 영화관과 자주 가던 커피집에서 평화를 찾는다. 애인은 동의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 나름대로 번잡스러운 여행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갖가지 잡음을 뒤로하고 무사히 축제를 마쳤다.

서울 외 자주 가는 여행지는 부산이다. 올해 21회를 맞은 부산영화제는 부산이라는 도시를 방문할 수 있는 좋은 구살이다. 작년에도 부산 영화제를 향해 홀로 기차를 탔다. 급히 결정된 여행에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떠났다. 보통 영화에서는 이런 여행이 더 즐거운 법이니까. 하지만 아늑한 저녁 광안리 해안가를 거닐다 들어간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의 몰골이 나를 여행의 낭만에서 끌어냈다. 방문을 넘어서는 순간 엄습하는 쾌쾌한 냄새, 고시원보다 좁은 방의 구조는 그렇다 쳐도 막상 들어와 보니 2인 1실이라는 압박감이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내 까다로운 성격과 함께 외국인 룸메이트의 소란스러운 행동에 내 인내심을 바닥을 쳤다. 계속 말을 걸어오는데, 내 회화 실력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해 쩔쩔맨다. 조악한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나와 도망치듯 작은 침대에 몸을 뉘이는데 잠은 왜 그리 안 오는지. 매주 동네에서 보는 영화를 굳이 4박 5일간 부산까지 와서 봐야 하는가 근원적인 의문이 생기면서 눈을 꼭 감았다. 왜 계속 먹어도 배는 아프지 않은지 생리적인 의문에 배를 만져보고 이내 찝찝해진다. 2층 침대의 드미트리는 동양인의 몸에 최적화된 침대에서 서양인의 우위를 자랑하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더니 기어코 한쪽 다리를 일층으로 늘어뜨리고, 낡은 에어컨은 가래를 끓고 있다. 여행지에서 숙소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면서 잠을 설쳤다.

보수동의 풍경

광안리 3분 거리의 숙소에서 맞이한 아침은 더없이 쾌청했다. 사전 예매를 안 해놔서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지만 그것마저 즐거운 것은 영화제라는 축제의 특성이다. 짠내 나는 바닷바람을 개처럼 코를 킁킁거려보고, 밀면집에 들어가 게걸스럽게 한 그릇 먹는다. 센텀시티 옆의 영화의 전당은 그 위용만으로 영화제의 심벌로 기능한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소개되었던 거장들의 영화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기회, 그래 난 바로 이 기회 때문에 영화제에 온 거구나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오늘 밤에 트미트리와 조우해야 한다는 변치 않는 사실을 잊고 다시 이 여행에 즐거움을 느낀다. 다음 날에는 잠시 시간을 내 못 가봤던 부산의 명소들을 찾았다. 사실 난 어느 동네를 가든 영화관부터 찾아보곤 한다. 지역의 독립영화관을 찾아보고 그 도시의 영화광들의 분위기를 살핀다. 커피 맛과 거리를 걷는 기분 같은 소소한 것들이 그 도시를 기억하는 조각들이 된다. 남들 다가는 태종대나 자갈치시장을 비롯한 명승지를 가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던지고 영화관을 향해 버스를 탔다. 내게 여행이란 유명하다는 원조집에 가서 줄 서서 호떡을 먹고, 좋아하지도 않는 시장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다.  남포동의 예술영화관인 아트 시어터 c&c에서 본 영화 <애프터 루시아>는 지금까지 내게 애틋한 영화로 남았다. 내게 부산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영화제에서 본 숱한 영화들이 아닌, 허름한 남포동의 자그마한 영화관에서 나를 찾아온 <애프터 루시아>가 분명하다. 아트시어터 C&C는 보수동 책방 골목을 들어가서 높은 계단을 오르면 눈에 들어온다. 교회당의 일 층에 자리 잡은 이 극장은 국제영화제로 온 동네가 시끄러운 와중에도 고요 속에서 우두커니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나 아니었으면 상영을 취소하려고 했던 아르바이트 청년의 볼멘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애프터 루시아Despues de Lucia, After Lucia, 2012

우디 알랜의 <블루 재스민>은 뉴욕에서 상위 1%의 삶을 살던 재스민이라는 여자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거지가 돼 동생이 사는 빈민가에 오게 됐는지 살펴보는 영화다. 우디 알랜 특유의 서늘한 농담과 케이트 블란쳇의 열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재스민은 재력가인 전 남편을 만나 화려한 뉴욕 상류층의 삶을 살았지만, 하루아침에 남편이 사기혐의로 기소되면서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고 거리로 내몰린다. 그로 말미암아 정신적 문제까지 생겨 혼잣말을 되뇌고, 과거에 천착해 허영과 사치를 버리지 못한다. 거지와 이혼녀라는 자괴감이 그녀의 정신을 붕괴시킨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시작된 조울증과 히스테리가 화려한 그녀의 겉모습을 비웃는다. 과거와 현재의 괴리감에 극심하게 찾아오는 깊은 슬픔까지. 재스민과 블루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동의어다.

블루 재스민Blue Jasmine, 2013

재스민은 동생 진저의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 진저는 이복동생이지만 왕래의 거의 없었기에 남이나 마찬가지다. 갑자기 낯선 곳에 떨어진 재스민은 평범한 삶과 병합하지 못하고 내내 겉돈다. 재스민은 새로운 삶을 위해 컴퓨터를 배우고, 치과에서 접수원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뿐. 다시 자신이 '있었던' 아니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재스민은 상류층에 대한 강박, 돈 많고 잘생긴 완벽한 남자에 대한 로망 그리고 명품에 대한 염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일종의 향수병을 오로지 과거에 천착하는 방식으로 해소한다. 그래서 늘 잠시 기거하는 환상과 기억의 편린이 불러낸 회한으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정신을 내려놓는다. 어쩌면 재스민에게 자신의 처지는 일종의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거의 악몽에 가까운 여정이지만 끝이 날 거라고 믿는 눈치다. 아마도 곧 그녀의 여정은 어떤 방식으로 끝이 날 것이다. 그것이 여행에 가까운 이질감인지, 늘 보던 골목길의 기시감인지 알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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