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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15. 2016

구애求愛의 아름다움과 고통

영화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감독 제임스 그레이

건너편 창문에서 여자는 자신의 가슴을 꺼내 보인다. 레너드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어 사랑을 고백한다. 두 사람의 불안한 시선, 서로를 향한 상반된 마음, 어느 영화가 그렇듯 <투 러버스>는 엇나간 사랑에 관한 영화다.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김혜리 기자가 사회를 보는 다시 보기 행사를 통해 <투 러버스>를 관람했다. 그리고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을 가진 이 영화를 말해보고 싶었다. 감독 제임스 그레이는 작년에 개봉한 <이민자>를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개인적으로 기존에 <위 오운 더 나잇>을 좋아했고, 최근에 개봉한 <히치콕 트뤼포> 역시 히치콕의 대표작을 다시금 찾아보게 하는 거대한 궁금증을 가진 영화였다. 감독 제임스 그레이를 빛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 날 자극하는 것 중 하나는 돌아서는 자의 처연한 뒷모습이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보다가 끝내 다시 돌아서고 마는 어리석은 자들이 한숨이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특히 <투 러버스>는 주인공 레너드가 끝내 버려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감정의 종착을 확인한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페르소나 '호아킨 피닉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거울 단계’라는 이론은 동물과 달리 사람은 생후 6개월이면 이미 거울 속의 나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거울을 보는 아기는 저 속의 못생긴 놈이 자신임을 알면서도 그 속에 푹 빠져든다. 평소 유아는 자기 몸을 늘 부분적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팔 따로, 배 따로, 다리 따로, 손 따로 느낀다. 그렇기에 몸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없고, 늘 불편한 신체를 어쩌지 못해 칭얼거린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다르다. 그는 완전하다 못해 어쩐지 미남이다. 몸뚱이에 사지가 다 붙어 꿈틀대고, 파편화된 나와 달리 거울 속에서 하나의 주체로 행동한다. 그러니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Two Lovers, 2008

미셀을 만나기 전 레오나드는 약혼한 여인에게 건강상의 이유로 버림받았다. 이후 그는 매일 자살을 생각하지만, 정작 그걸 해낼 도리가 없는 겁쟁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레너드가 난데없이 물에 뛰어들고 끝내 비참하게 다시 건져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애타는 부모는 그의 병이 심해졌을까 봐 걱정이다. 레너드는 조울증에 걸린 남자다. 정신이 반쯤 나가서 설쳐대던 레너드는 아버지의 세탁소에서 배달이나 하며 늘 딴생각에 몰두한다. 세상과는 분리된 표정으로 피식피식 웃다가 바람 빠진 인형처럼 침잠한다. 그는 명백히 이 거짓된 삶이 종료되길 바란다. 그는 라캉이 말한 거울을 바라보는 아이와 다를 바 없다. 파편화되어 깨져버린 존재로 거울 속의 완전한 나를 찾아 시선을 정돈하지 못하는 남자다. 어느 날 레너드는 자신의 방 창문으로 이웃집을 보다가 매혹적인 블론디에게 첫눈에 반해버린다. 당최 가늠하기 힘든 유형의 여자답게 흔들리는 마음을 울음과 애걸로 일관하며, 주변 남자에게 기대 버리는 습성은 남자를 속 타게 할 뿐이다. 우리 어머니가 이런 여자는 피하고 볼 일이라 했는데, 가냘픈 몸짓과 우아한 옷매무새가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기네스 펠트로는 이 역할에 적격이다.) 더 이상한 점은 레너드에겐 이미 미녀의 약혼녀 산드라가 있다는 점이다. 레너드가 세탁소에서 어머니와 브루스를 추는 모습에 반했다는 이 흑발 여성은 미인인 데다 성품이 온화해 동네 남자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레너드네 세탁소와 비교도 되지 않는 큰 대형 체인을 운영하는 재력가다. 더 이상의 요건을 갖추기도 어려운 완벽한 조건의 산드라는 왜 레너드의 '첫 번째' 선택이 되지 못했을까. 그건 그녀가 그의 방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비네사 쇼'는 블론디의 반대편에 선 여자로 레너드를 붙잡는다.

라캉은 거울 단계 실험을 통해 인간이 자라나는데 이 단계가 필수적인 요소임을 밝혀냈다. 아기는 자신을 거울 속의 녀석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의식을 형성한다. 아직 온전히 자신을 잊고 오로지 이미지로서 상상하며 자신을 주조 해내간다. 이는 명백한 오인이자 착각이지만 그것을 믿어버림으로써 성장할 수 있다. 더욱 애달픈 건 이 착각이 유아기 때만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늘 셀카를 찍어대지만 그곳의 나는 내가 아는 나완 다르다. 더 미남이고, 더 매끈하며 더 젊어 보인다. 폰을 뒤틀고 앱으로 제 살을 깎아 이미지 속 나를 만든다. 명백한 거울 단계의 연장이다. 또한 라캉의 이 이론은 예술에 관한 이론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스크린과 액자 속의 대상을 향한 그리움은 예술은 본원 아니던가. <투 러버스>의 레너드는 자신의 방 창에서 자신과 다른 완전한 존재를 봤다. 미셀의 완벽한 아름다움이 그녀의 방 조명과 함께 아슬아슬한 노출을 겸비하여 레너드의 눈 속으로 들어왔을 때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레너드는 그녀와 함께 완성될 자신의 미래를 그렸다. 레너드는 건너편 창문에서 자기 가슴을 꺼내 보이는 그녀의 이미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는 안정된 집안의 약혼녀가 줄 수 없는 욕망의 덩어리다.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태로운 유혹일 것이다. 그리고 밝은 명도에 노출된 미셀과 다소 침침한 조명으로 보인 산드라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인도한 레너드의 선택이기도 하다

창 밖에 선 여자 '기네스 팰트로'

영화의 마지막, 그녀에게 버림받고 축 처진 어깨로 돌아온 레너드는 예상과 달리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태연하게 산드라에게 프러포즈한다. 모든 상황을 아는 엄마는 아들의 모습에 심란하다.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레너드는 카메라와 눈을 마주친다. 정념에 찬 눈에 눈물도 아닌 무언가가 맺혀있다. 체념과 죽음일까, 정적으로 잦아드는 화면. 이 대단원에 난 심한 의심을 느꼈다. 뭔가 놓쳐버린 듯 찜찜한 기운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투 러버스>는 드물게 고전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정통 멜로드라마처럼 보인다. 제임스 그레이는 말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우리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그리고 “당신이 왜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당신이 왜 그 사람과 결혼하는지” 묻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끝내 버리는 연대기의 의문스러움. 구애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통해 삶을 해석하는 그레이의 영화가 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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