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Exhalation, 테드 창
종종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던진다. 침묵이 미덥지 못할 때 던지는 말이다. 상대와 점이지대를 찾다 보니 뻔한 질문이 알맞다. 대화의 물꼬가 트길 바랐기에 주저함은 없다. 난 당신을 알아갈 용의가 있어요. 똘똘한 눈빛으로 의례적인 질문을 던진다. 종종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상대 역시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상천외한 대답은 오히려 대화에 독이다. 내가 호의로 질문을 던진 것처럼 상대도 그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화답을 기대한다. '제 취미는 영화 보는 거예요.' 난 최근 개봉작 떠올리며 이어나갈 말을 준비했다. 세상에 영화 싫어하는 사람 없고, 최근 영화 한 편 안 본 사람은 드무니까. 이 정도면 적절한 대응이다. '저 영화 싫어해요'가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요즘 낯선 이와 마주할 시간이 많아서 의례적인 대화에 익숙하다. 어색한 사이를 무마하려고 열심히 상호주관적인 카테고리 안에서 문장을 꺼내 쓴다. '식사는 하셨어요?'라는 질문에 '고등어자반에 시금치를 비롯한 6첩 반상에 든든히 먹고 커피믹스로 입가심했어요'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낯선 사람과 친밀해지기 위해서라면 알맹이가 없더라도 요령껏 말을 고른다. 무엇보다도 칭찬할만한 구석이 나오면 놓치지 않고 짚어줘야 마땅하다. '아 요즘 다이어트하시는구나. 어쩐지 멀리서 걸어오는데 병약해 보이시더라고요.' 할 때는 어색하지만 막상 들으면 뿅 가는 게 칭찬이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닌 게 칭찬을 받는 요령이다. 나는 날 때부터 도시인이었다. 상대방에게 칭찬을 들으면 칭찬으로 대응해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근데 종종 칭찬에 취해 그걸 잊는다. 겸손을 가장한 머쓱한 태도를 취하다가 타이밍을 놓친다. 머리를 긁적이며 칭찬의 희열에 빠져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너는 예전보다 신수가 훤해졌는걸. 허허허.' 곧바로 수습해보려고 어색한 칭찬을 건네지만 이미 늦었다. 고맙게도 상대는 내 의례적인 말에도 내색 없이 웃으며 손사래 친다.
지난 독서 모임에서 누군가 예술의 의미에 관해 물었다. 난 자주 생각해왔으면서도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사실 좀 당황했다.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예술이 뭔지 떠올려보니 아득했다. 나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못했기에 답을 할 수 없다. 내 일상에서 예술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멋들어지게 답을 적고 싶지만 그럴싸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말을 골라봤지만, 허공을 빙빙 돈다. 의례적인 대답 외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건 마치 '왜 사세요'라는 질문에 숨을 들이마시는 것 외엔 어떤 반응도 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난 보고 듣기엔 익숙하지만, 여전히 말하고 쓰기가 불편하다. 조금만 방향이 비껴가면 말문이 막힌다. 평소 질문을 하지 않았기에 혼란에 빠진다. 분명 속으로는 뭔가를 느끼고 있는데 말로 하기가 어렵다. 내 의견을 정리하는 게 버겁다. 훈련이 덜 되어서인지 늘 남이 해주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게 편하다. 그러니 일상의 대화도 늘 비슷한 궤도에 머문다. 조금만 말길을 돌려도 상대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 서술이 부족하고 묘사가 어색하니 역부족이다. 그러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그럴만한 얘기로 초점을 돌린다. 이 넓은 식당에서 모두가 하는 그런 얘기들로 자리를 더럽힌다. 세상은 다 그럴만한 일에서 관성처럼 흘러가니까 그게 편하다. 흔해빠지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 말처럼 쉽지 않다.
평소 언어 결정론을 신봉한다. 언어에 순종하며 사는 기분이랄까. 인간 사고의 내용과 구조는 언어에 의해 형성된다고 믿는다. 점점 더 내가 하는 말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진다. 어휘력이 부족해서 세상이 협소해지는 기분이다. 경험은 제한적이고 움직임의 폭은 비좁다. 경험을 확장한답시고 독서를 하지만 늘 편한 것만 읽으려고 한다. 요즘엔 초조함에 언어를 확장할 수 있는 분야로 나아간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처럼 세계 각지를 돌며 손오공식의 모험을 할 순 없는 노릇이니 책이라도 다채롭게 읽어보려고 기를 쓴다. 부대끼지만 내가 다다르지 못한 언어의 대지로 향한다. 복잡한 수식과 도무지 말로 하기 어려운 통찰마저 어떻게든 서술해낸 학자를 추종한다. 평소 볼 수 없는 기호가 가득한 분야를 찾아 서점을 거닌다. 망망대해에서 난파해 무려 서른 해를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간 로빈슨 크루소처럼 난감한 기분이다.
테드 창은 날 확장한 사람 중 하나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내가 쓰지 않았던 머리 한구석을 굴린 기분이 든다. 인공지능을 가진 가상 애완동물을 다룬 이야기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같은 작품은 그 어떤 곳에서도 보지 못했던 고민이 담겨있다. 테드 창의 소설은 사건과 혼란에 경험을 비추는 여타 SF 작품들과 다르다. 그는 상상의 지향을 한 인간의 속내를 추측하는 데 소비한다. 만일이라는 가정을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대답을 구하는 데 쓴다. 결국, 어떤 세상이 도래해도 한 인간의 속내라는 건 문학이 살피는 검침표 같은 거다. 반복적으로 들여다보고 체크하고 기록해서 그 추이를 지켜봐야 마땅하다. 맥락을 살피고 속내를 헤아려 이해에 가닿는다. 그건 마치 뜨거운 돌덩이에 찬물을 붓는 것과 같아서 자칫하면 감정적으로 뜨거워질 만한 화두를 곡진한 말로 구슬린다. 테드 창은 기술의 발전도 결국엔 세상살이에 보태거나 제하는 것의 문제라는 점을 상기한다. 과학적 상아탑 위에서 거시적 안목으로 중생을 굽어보기보단, 마치 하나의 공식을 증명하는 태도로 일상을 살펴 혼돈에 빠진 인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지난 1년간 읽은 책들을 돌아본다. 난 책이 나를 성장하게 했다는 말에 콧방귀를 뀐다. 독서를 과장하면 더없이 우스워질 뿐이다. 책은 허영이며 하나의 놀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남몰래 문학적이라는 말로 삶을 지탱했다. 읽으면 뭐라도 될 거라는 마음으로 썼다. 소설 속 누군가를 곱씹으며 모욕을 견뎠다.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도 설국을 꿈꿨고, 늘 가던 카페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릴 땐 끝내 실낙원의 자취를 적을 수 있었다. 내 책과 일상에 관해 떠들어준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혼자 버텼던 시간이 지금처럼 떳떳할 순 없었으리라. 늘 혼자 잘할 거라고 주접을 떨었지만 결국 난 당신에게 닿기 위해 오늘도 서가를 거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