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by 박민진

난 가까운 지인이 차갑고 냉담한 의사를 만나 고생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진찰 과정에서 마음이 다쳐 낙담하는 상황은 환자 본인에겐 목숨이 오가는 일이다. 병든 환자는 의사 앞에서 무력하니까. 목숨줄을 쥔 의사는 벌벌 기는 그를 마치 하나의 증상으로 취급한다. 새 하얀 가운과 라벤더 향이 풍기는 모던한 진찰실에서 펜으로 그의 통증을 휘갈긴다. 난 당시 내로라하는 전문의가 가진 오만과 핏기 없는 처사에 분개했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자가 누군가의 아픔을 돌볼 수 있을까. 공감과 헤아림이 없는 의학이 얼마나 메마른 것인지 절감했다. 문학적 상상력은 비단 먼 얘기가 아니라, 어떤 학문 분야 가릴 것 없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올리버 색스를 참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그를 찾아 읽고 그의 사고를 따랐다. 세계적인 신경의학자인 색스는 온갖 취향을 지닌 생활인으로서 흥미로운 이력을 가졌다. 그는 다독가이면서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고 온 도시를 떠다니는 방랑자이자, 엄청난 근력을 자랑하는 파워리프터다. 무엇보다 온갖 분야를 오가는 집필 내역이 그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짐작게 한다. 그를 보면 어떤 분야든 경지에 다다르려면 대지를 넓게 파서 나아가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전언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인문학적 소양이 실무 영역에서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실사례를 목격한 기분이 든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그가 임상 기록을 문학으로 승격시킨 희귀한 역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더 나아가 내가 어떤 지향을 가진 사람인지 절감할 수 있었다. 누구나 귀찮다고 손사래 치는 생의 복잡함을, 그 지난한 관찰의 과정 곁에 비집고 들어가서 머물고 싶다. 내가 독서 모임에 가는 이유도 비슷하다. 대화에 감도는 선명한 유머 감각과 불현듯 삐죽이는 독설에 도취하여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다. 특히 나이 차이가 심히 벌어진 이들과 대화할 땐 내가 좀 더 열리는 기분이 든다. 전혀 모르는 주제가 툭툭 튀어나오니 정신을 못 차리지만, 옆자리 누군가는 친절하게도 그건 이건 이런 얘기야, 라고 설명해준다. 좀 창피하지만 그래도 등허리를 의자에서 뗀 채 몸을 앞으로 숙이고 열심히 받아들이려고 애쓴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다 보면 세상이 더 넓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