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방인

by 박민진

첫 문장을 기억하는 소설이 있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점심을 먹다가 문득 창밖을 볼 때 불현듯 외는. 그중에서도 카뮈의 <이방인>은 별난 울림을 가진 작품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한 소년이 살인죄로 기소되고,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을 때까지 이 문장은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소설에서 첫 문장은 연애의 첫 만남처럼 관계를 좌우한다. 역시 잘생긴 게 최고라는 말을 들으려면, 매혹적인 도입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눈길을 사로잡고 나면, 그다음 문장을 읽지 않기란 어렵다. 서점엔 오늘도 온갖 소설이 쏟아지지만, 진짜배기는 어김없이 고고한 첫 문장을 나직하게 속삭이는 법이다.

이번 주 내내 민음사 판 <이방인>을 ‘다시’ 읽었다. 작가 이탈로 칼비노에 따르면 처음 읽으면서도 다시 읽는다고 말하는 책이 고전이라는데, 나 역시 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고 적었으니 고전이 틀림없다. 칼비노는 고전이란 다시 읽어도 매번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게 되는 책이라던데, <이방인>도 새로운 걸 넘어 생경하기까지 한 걸 보니 불세출의 반열에 오를만하다. 한참 딴짓을 하다가 커피가 식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책장을 펴서 넘기기 시작했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뫼르소를 따라가는 여정은 고됐다. 녀석에게 자꾸 너 어쩌려는 심산이냐, 되물었다. 하지만 녀석은 눈치도 주변머리도 없이 어리숙한 짓을 반복했다. 내가 좀 살아봐서 아는데, 너 그러다 큰일 나. 아무리 녀석의 옆구리를 찔러도 요지부동이다. 뫼르소는 친구에겐 진짜 남자라 불리지만 남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무뢰한에 가깝다. 난 녀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조언을 건넸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녀석이 카뮈 형이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안 봤을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녀석이 곧 사형에 처하게 되리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다.


퇴근 후 내게 주어진 세 시간을 몽땅 카뮈와 씨름하는 게 즐거울 리는 없다. 그런데도 뫼르소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건 잘한 일이었다. 녀석이 의문을 제기한 문제는 나를 좇아왔고, 그 과정에서 매일 무턱대고 맞았던 아침을 잠시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이상 신호에도 제동을 걸지 못하고 꾸역꾸역 받아들였던 내 생계가 눈에 들어왔다. 뫼르소는 그렇게 많은 글을 쓰면서도 현실을 변혁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한 눈치였다. 내가 사는 꼴이 우습겠지. 녀석의 실존은 내겐 속 편한 소리처럼 들렸지만, 마음 한구석은 내내 불편했다. 사는 데 도움이 될만한 알맹이를 집어내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김화영 선생이 해설한 글까지 꼼꼼히 읽었다. 그는 왜 그랬을까. 왜 죽였을까. 모른 척할 수 없는 질문의 연쇄에 내 나름대로의 답을 적어보았다.


뫼르소는 살인 혐의로 선 법정에서 왜 사람을 죽였냐는 판사의 질문에 타오르는 태양에 눈이 부셔셔,라고 답한다. 이때 뫼르소의 담당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한다. 답이 없는 어리숙한 녀석이 허튼 대답을 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이방인이 지닌 유머 코드다. 사실 누가 누군가를 죽일 때 꼭 분명한 이유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동기가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우발적인 뭔가엔 설명할 수 없는 구석이 있으니까. 감정은 복잡하고 애매한 법이다. 내가 왜 사람을 죽였는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까. 틀림없는 건 녀석은 그때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난 뫼르소의 속내를 짐작해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1인칭 화자로 제 생각을 독자를 통해 흘리지만, 그가 어떤 맥락으로 살인에 이르렀는지 추측하려면 턱을 괴고 상상해야 한다. 난 내가 놓친 게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책장을 앞으로 돌려 꼼꼼하게 살폈다. 며칠 전 뫼르소는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다. 그는 피로했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슬픔보다는 내내 관습에 가까운 절차를 따르느라 분주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틈바구니가 숨 막혔다. 당연한 수순처럼 능숙하게 망자를 떠나보내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음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처리하는 관례에 몰두하는 게 이상했다. 그들은 슬픔을 표할 때도 허례에 불과한 말을 붙이고, 죽음을 동정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뫼르소는 능숙한 그들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오직 바라는 게 있다면 어서 장례를 치르고, 그들을 빠져나와 애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자신에게 익숙한 여름날의 마을 풍경과 천진한 바닷가 골목 어귀를 홀로 걷고 싶을 따름이었다. 법정은 뫼르소에게 어머니를 잃은 자식이라면 응당 해야 할 행동을 강요했고, 그는 맡겨진 배역을 연기하지 못해 궁지에 몰렸다. 이쯤 되면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명백하다. 사회 부적응을 넘어, 시스템을 부정하는 불순분자. 뫼르소는 그때부터 기요틴에 목을 넣을 때까지 우스운 세상을 외면한다. 그는 항변하기보다 부정함으로써 저항한다. 따져 묻기보다는 실토하지 않음으로써 당당하다. 그에게 사람들은 무의미를 길어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보였고, 자신은 그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방인>이 가진 폭력성은 시선에 있다. 뫼르소는 온갖 사람들이 지닌 통념에 놀아난다. 왜 당신은 어머니의 장례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느냐. 왜 당신은 밀크커피를 마시며 직원과 시시덕거렸냐. 왜 당신은 장례를 치르자마자 놀러 갔냐. 왜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여자랑 잤냐. 아무도 그의 심정이나 내적 갈등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는 발언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악한으로 몰린다. 사뭇 우습게까지 느껴지는 법정의 진술 과정은 세상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자신의 죄를 논하는 자리에서 자신을 배제해내는 공권력의 부조리. 속내를 숨기고 허튼 말을 뇌까려야 납득하는 대중 주류의 정서. 실존주의 철학에 의하면 세상에 던져진 존재는 끝없이 질문해야 마땅하다. 이유 없는 실천은 실존과 거리가 멀다. 뫼르소는 보편이라는 폭력에 침묵으로 대항했다. 왜라는 질문 자체에 관심이 없는 무리 틈에서 스스로 묻고 또 물으며 죽음을 기다린다. 이런 뫼르소의 면모에 관해 카뮈는 영적인 신화라 말하기도 했다. 난 사회 교육 절차에 따라 규범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습득했다. 하지만 내 삶에서 깨달음이라는 말은 수동적인 지시에 불과하다. 그냥 넋 놓고 믿어버리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흥건하다.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느라 의미를 잊고 고 살았다. 신은 인간을 이유 없이 이 땅에 보냈지만, 인간은 이유를 찾지 못하면 점차 지쳐갈 뿐이다. 끝없는 무의미와 싸움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숙명이 아닐까. 내가 겁내는 건 질문이 겁나 게으른 말로 뭐든 수긍하는 태도에 있다. 인간 세상이 지닌 복잡성을 외면하고,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냐며 면박을 주는 태만함이다.

나는 간혹 세상이 끝장나 더는 소생 가능성이 없길 바란다. 중이병에 걸린 지 어언 십 년이 넘어가지만, 병세는 그칠 줄 모른다. 요새도 바닥을 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굴기도 한다.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목구멍은 포도청이라 어디까지나 미수에 그치지만, 비탄에 빠진 소설을 읽으며 대리 만족한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불 꺼진 쇠창살 안에서 처참한 몰골로 골몰한다. 난 거기서 내 모습을 본다. 방구석에서 세상을 미워하고, 냉소적인 게 폼 난다고 우악스러운 말을 블로그에 휘갈기며 비웃음을 산다. 소년을 위로하는 말은 점차 사라지고, 어른스러움이라는 말이 망설임 없이 아침 출근길을 숨 막히게 한다. 뫼르소는 관례와 답습이 가득한 세상을 부정하기 위해 총을 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투덜대는 게 전부다. 속은 시한폭탄처럼 끓고 괴물 같은 상상이 멈출 줄 모른다. 세상이 온통 성적인 유혹으로만 보이고, 누군가를 볼 때 노골적으로 관능을 살핀다. 욕구는 들끓지만 속은 열등감으로 문드러진다. 아무리 자위해도 나를 위해주는 느낌을 받기 어려워 글쓰기로 요원한 인정투쟁에 나선다. 난 <이방인>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던가. 나 같은 미친놈이 여기도 있네. 속으로는 뫼르소처럼 방아쇠를 당기고 싶어도, 몸을 수그리고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사무실에 앉아서 퇴근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