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보통을 읽는 이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by 박민진

날씨 때문인지 게으름인지 요즘 무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루에 한 번 가는 체육관에선 몸이 천근만근이다. 왠지 모르게 어제보다 더 힘든, 같은 무게인데도 몸이 더 뻐근하다.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를 짚고 날 놀리는 에어팟을 떼어낸다. 샤워하고 의자에 몸을 기대 친구 전화를 받았다. ‘넌 요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치 잡념의 숙주가 된 것 같다고 도통 떨쳐내지 못한 생각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그렇게 내 얘기만 하다가 끊어버렸다. 미안하다 미안해. 너도 이해할 수 있는지, 누구나 하루에 한 번쯤은 귀찮아도 후다닥 해내는 그런 일마저도 너무 무거운, 그런 시간이 코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켜켜이 쌓인 일과가 날 놀려댄다고. 에어팟 프로를 사서 귀를 틀어막으면 기분이 좀 풀리려나.


사랑의 실체를 잡아내려는 무수한 책을 읽었다. 어떤 건 좋았고 간혹 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대체로 세상 연애담은 다 고만고만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 나온 연인의 밀담이란 동어 반복에 불과한 게 아닌가 생각도 한다. 늘 비슷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얼토당토않은 문제로 이별한다. 사랑에 배신당한 개츠비라면 책을 읽으며 감화할지 모르나, 나같이 매사 냉소적인 사람은 하품을 참기 어렵다. 내 생각에 사랑이란 정작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자취를 감춰버린다. 오히려 사랑 주변부, 마치 도넛처럼 사랑이 앗아간 공동을 응시할 때 비로소 슬쩍 보이는 정도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표지만 보면 '샤갈'처럼 사랑을 예찬하는 내용으로 보이지만, 정작 내용을 읽어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깨닫는다. 출간 당시 스물아홉 철학도였던 알랭 드 보통은 세상 남녀가 가진 통념에 각을 세우며 이 책을 썼다. 인류가 쌓아 올린 지성을 발판 삼아 뻔한 사랑을 일삼는 젊은이를 조롱한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연애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작가 눈에는 그 모든 행태가 구태의연하다. 연애가 가진 사회 통념은 고전 소설이 ‘복붙’하듯 되풀이한 행태에 불과하다. 연애 심리는 흔하디흔한 철학 이론으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 이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태도로 알랭 드 보통은 로맨스의 법칙을 깨부수는 통찰을 내세운다. 내 고유한 사랑이 타인의 눈엔 그저 개체의 특성일 뿐이라니. 난 무수한 독자가 왜 알랭 드 보통을 읽는지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한다. 수많은 독자가 그런 보통의 사랑이라도 하고 싶다며 밑줄을 긋는 모습이 선연하다.

내 생각에 알랭 드 보통의 매력은 정답을 쥐여주는 친절함에 있다. 사랑이라는 정체불명에다가 성질까지 고약한 녀석을 해독해준다. 포디즘 공산품처럼 천편일률인 남녀의 사정은 따분하지만, 그 사랑이 어떤 화학작용을 거치는가는 들어봄 직하다. 내 실패한 사랑도 어쩌면 이유도 있을지 모른다는, 끝내 더 잘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이랄까. 모든 이별엔 네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라, 다 그렇게 흘리며 산다고 말해준다.


연애의 환승 통로엔 무수한 인파가 오가지만 정작 내 인연은 야생동물처럼 희귀하다. 길을 가다가 옷깃 스친 이와 사랑에 빠질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아마 매주 당첨자가 나오는 로또 당첨 확률보다는 높을 것이다. 그래서 난 기어코 인연을 기대하는 마음을 일상에 적는다. 혼자가 편하다고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일말의 기대를 복권처럼 지갑 안에 넣어둔다. 하지만 목 빠지게 기대하는 낭만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TV 드라마 속 사랑은 특유의 허황함에 구역질이 난다. 작위를 덕지덕지 붙이곤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는 수많은 우연을 받아들인다. 반면 문학은 어떤가. 고독한 이는 문학을 읽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문학에 사랑은 필연이지만 작가는 우연을 멸시한다. 인연이라는 당의정 없이 사랑이 달콤할 수 있을까. 남이 보기엔 우연이라도 내겐 하나뿐인 운명 아니던가. 애초에 현실적인 연애란 허구에 불과하다. 핍진성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문학은 연애의 스펙터클일랑 애초에 관심이 없다. 오직 사랑 후에 오는 고독을 통해 하나뿐인 인연을 멸시한다. 이 작가는 연애도 안 해봤구나, 라는 핀잔을 감수하고서라도 홀로 사색을 택한다. 네가 '쿤데라'라도 되냐며 힐난해도 어쩔 수 없다. 사랑의 환희보다는 생의 뼈아픔에 관심을 쏟는 문학사의 걸작은 대체로 인정머리가 없는 작자들에 의해 탄생했다.

알랭 드 보통의 또 다른 매력은 흔한 연애담을 비트는 솜씨에 있다.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에선 노스탤지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한 남자가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는 회한을 말한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는 지질한 남자만이 후회하고 복기한다. 만약 내가 이랬다면 헤어지지 않을 수 있지 않겠냐는 쓸데없는 가정이다. 난 이런 감정이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순수문학과 연애소설의 점이지대에 안착시킨다고 생각한다. 책 후반부 이별을 복기하는 소설 화자는 레이철이라는 운명의 연인이 가진 속내를 미루어 짐작한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던 남자라는 개체의 어리석음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하는 연애에서 이별엔 이유가 없지만 알랭 드 보통에겐 다 이유가 있다. 과거를 끄집어내서 그 현상을 철학 이론으로 명명하고 나면 내 이별도 전과 다르게 분명하게 보인다. 그래서 오늘도 교보문고 스테디셀러 서가에는 사랑을 잃은 무수한 이가 알랭 드 보통을 읽으며 스스로 ‘보통’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인제 그만 읽어야지 하면서도 더 나은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에 개체의 특성을 찾아 나선다. 어쩌면 그건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던 내 실연을 이해받고 싶은 애처로운 맘은 아닐까.


알랭 드 보통은 작가 개인의 인기가 대단하다. 작품 자체가 작가의 지식과 통찰에 의지하기에 더 그렇다. (밀란 쿤데라와 이승우 작가가 비슷한 예다) 보통이 매력적인 건 작가 자신이 까칠하고 가끔은 오만하며 이해할 수 없는 변덕을 반복하는 우둔한 남자의 표상이라는 점이다. 미숙한 작가의 됨됨이가 캐릭터 안에 고스란히 담긴다. 그도 나와 같은 어리석은 남자라는 위안이랄까. 그걸 숨기지도 않고 애써 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연애소설을 독파하고 온갖 유명한 철학서를 읽으며 공부하는 안경잡이처럼 독자와 함께 목마른 지적 허영을 채워나간다. 플라톤, 니체, 마르크스, 융, 벤담 등이 너나 할 것 없이 등장해서 뻔한 연애담에 고명을 뿌린다. 마치 사랑의 씨실과 날실을 한데 엮어 근사한 기성품을 만들어내는 방직공처럼 능숙하다. 소설 후반부에 감상에 빠져 접영을 하는 실연남은 읊조린다. 자기 위악과 절절한 호소로 비척거리는 내 모습 같아 낯설지 않다. 마치 연애소설을 수업 시간에 몰래 읽는 소년처럼 미숙한 감정이다. 이 풋풋한 철학자는 삶에 대해선 뭘 좀 아는지 몰라도 연애엔 숙맥이다. 스스로 초래한 혼란에 이유를 갖다 붙이곤 중언부언한다. 마치 뼈대만 앙상한 이론으로 무장한 북유럽 복지정책처럼 때깔만 번지르르하다. 알랭 드 보통은 기가 죽은 소년의 모습으로 모두 다 아는 작가에 대한 신화를 해체하고, 독자와 동등한 자리에 서서 제 사연을 토로한다.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볼 수 있는 화자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좋아한다. 뉴욕과 런던의 핫한 술집엔 평소 독서력을 추측할 수 있는 두꺼운 책이 놓여있다. 그의 책이 꽤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서점 스테디셀러에 생존해 있는 건 허영을 자극하는 분위기가 큰 몫을 차지한다. 근사한 런던의 카페와 미술관을 세심하게 묘사하는 작법은 요즘 같은 인스타그램 세대에겐 익숙한 일이니까. 안경을 고쳐 쓰고 인류 지성의 틈바구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며 유식한 척을 하기에 카페와 술집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그 테이블 위에 알랭 드 보통의 책이 놓여있다.


알랭 드 보통과 비견되는 작가라면 쿤데라와 이승우 외에도 ‘롤랑 바르트’를 들 수 있다. 과거 <사랑의 단상>을 읽다가 욕지거리를 하고 던져버린 기억이 있다. 이 책은 1977년 출간된 뒤 무려 20만 부나 팔렸다던데, 나는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두 작가는 사랑이라는 ‘통속적’인 주제를 다루고, 형식적으로 말꼬리를 잡아 늘어뜨려 질리게 만드는 게 비슷하다. 두 작가의 결정적인 차이는 지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바르트가 말하는 사랑은 현학적이다 못해 난처하다. 마치 사랑의 속성 자체가 불가지론에 가닿아 있다는 경고처럼 읽힌다. 그러므로 사랑을 기승전결 없이 하나의 불가해한 형상으로 그린다. 이에 반해 보통의 사랑은 기술적인 교훈을 동반한다. 그는 사랑의 과정에서 배움이 있고 그로 말미암아 좀 더 나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종의 ‘멘토’처럼 사랑을 일종의 배움이라 말한다.

알랭 드 보통은 현재 사회 전방위로 관심사를 옮기고 있다. 건축, 문학, 사회학, 교육 등 관심사는 끝이 없다. 하나의 지식인으로서 그의 야심은 공리주의자처럼 보인다. 최근 ‘인생 학교’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삶을 더 나아지게 한다는 다소 계몽적인 사업 구상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염세주의자인 척하는 낙천주의자로서 지성이 삶에 끼치는 영향을 시험하는 데 공을 들인다. 가닿을 수 없는 사랑과 기대 같지 않은 연애, 직업의 불안과 현대 예술의 난해함. 인생은 여러 방면에서 의심투성이다. 하지만 보통은 배움이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태도로 책을 통해 힐링캠프를 차린 모양새다. 지나치게 순수한 선의랄까. 난 알랭 드 보통 넓이를 사랑하지만, 그의 깊이엔 여전히 팔짱을 낀다. 초창기 더벅머리 시절 그의 연애 소설을 더 좋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