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기억하고 있는 것

빛의 과거

by 박민진

최근 노트에 적어둔 글귀가 있다. “삶은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대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문장이다. 결국,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이 삶을 판가름한다. 말도 안 되고 사실 좀 가혹하지만 난 이 말을 믿고 산다. 그래서 별로 나아질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믿지도 않는 미덕을 글로 적는다.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결국 우리가 보낸 긴 시간을 몇 마디로 압축하는 것이고, 새로운 사람을 위해 과거를 악의적으로 왜곡할 수도 있다. 다 마음이 편해지자고 하는 기억이니, 그 속에서 소중했던 추억을 거세당한 상대는 억울할 노릇이다. 끝내 미화해서 기억하는 사람은 순진하기는 해도 삶을 위로하는데 능통하다. 다 좋았고 배운 게 있었어, 아름다운 기억을 남겼으니 그걸로 됐어. 말은 그 자체로 기운이라, 미덕은 삶을 향한 찬미라 볼 수 있다.


은희경의 소설 <빛의 과거>는 77년 엄혹한 시절 얘기지만, 이야기 톤은 그녀의 여타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억이라는 흔한 주제와 통념에 벗어나지 못해 실수를 반복하는 군상이 여전하다. 화자는 차가운 눈으로 제 앞에 나타난 인물의 기질과 성향을 짚어낸다. 은희경은 그 각각의 해석이 모여 저마다 다른 생을 만든다는 걸 안다. 마치 평행 우주처럼 여러 관찰자 시점이 한데 모여 팽창한다. 그렇게 세계가 풍부해지고, 난 그걸 보는 재미에 은희경을 여전히 읽는다. 우린 오직 제 관점만 믿지만, 무수한 시선이 교차하는 이 도시엔 무수히 교차하는 시선이 상존한다. 시간이 지나 기억이 희미해지고 때론 왜곡을 일삼으며 우린 영문을 알 수 없는 상실을 경험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력은 퇴보하고, 처음엔 비슷해 보였던 우주도 서로를 탓하듯 뒤틀린다.

은희경은 지나간 기억을 붙잡기 위해 소설을 쓰고, 팽창하는 우주에 힘을 보탠다. 소극적인 유경과 약삭빠른 희진 역시 서로 반대편에 서서 세상을 해석한다. 양극단에서 팽팽한 장력으로 이 뻔한 도시를 끌어당긴다. 두 사람은 다른 기억의 축대를 세워놓고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마다 부딪친다. 질투와 증오, 연민과 동경이 맞부딪쳐 쉽게 눈을 뗄 수 없다. 그건 마치 마모하는 타이어처럼 자극에 익숙해지고 슬픔에 무덤덤해지는 노화의 과정처럼 느껴진다.

은희경 특유의 밀고 당기는 대사를 보는 재미도 여전하고, 무엇보다 공고한 작가의 통찰을 읽는 재미가 있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왠지 은희경이라면 친구의 예식을 외면한 나 같은 얼간이를 싸늘하게 쏘아붙일 것만 같다. 어쩌면 의외로 내 마음을 이해해줄 줄지도 모른다. 난 은희경이 머문 드립 커피집의 풍경과 그녀가 기거했던 여자 대학교의 정경을 떠올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내 곁을 지켰던 누군가를 떠나보냈을 때의 상실에 시달렸다. 영영 볼 수 없는 사람에 대한 회한이 욱신거린다. 어쨌든 내일을 살아야 하니 내 방식대로 기억을 저장한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해도, 아프고 욱신거리는 것만 솎아낸다. 나도 이걸 버팀목 삼아 또 다른 누군가 아니 기억을 만들어야 할 터다. 그러려면 증오도 분노도 원망도 치기도 어쩔 수 없다. 다른 한켠에선 여전한 그리움에 뜨신 감각들을 별도로 추출한다. 그리고 통에 미련이라고 써서 붙인다. 부산스럽게도 그러하다.


모든 문학의 본류는 비극이라 믿고 산다. 그래서인지 내 삶의 구성물은 대부분 불행과 닿는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싫다. 불행을 어색하게 만드는 행복이라는 기본값은 폭력이다. 행복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보는 긍정주의는 질색이다. ‘아니 불’ 자를 붙여 행복에 매달린 불행이 불쌍하다. 내게 가치 있는 순간은 대부분 불행에서 기인한다. 음울한 생각에서 글이 솟는다. 어제 공들여 적은 글을 브런치에 올렸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신경을 써서 문장을 다듬었다. 불행을 나열하고 들여다보았다. 쓰는 것이 쓰지 않음보다 나은 것은 내 불행이 당신의 불행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