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에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by 박민진

아버지는 퇴근 후에 소설을 재미나게 읽으셨다. 황토색종이봉투에 신간 소설을 들고 씻자마자 방 한구석에서 얼굴을 가린 채 몰입했다. 내가 앞에서 깐족거려서 얼굴을 덮은 책을 치우지 않았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결연했다. 거기엔 감히 내가 침범할 수 없는 내밀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일터의 고단함을 떨치려 소설을 읽었다. 자기만의 방이 없으니 소설 속에 은거했다. 이야기 안은 단단하며 독립적이고 아늑했다. 허구의 세계는 변치 않았고, 펼쳐 들면 어김없이 곡진했다. 흔한 일상다반사와 달리 예사롭지 않았다. 아버지의 서가엔 은희경과 신경숙, 윤대녕, 성석제가 있었다. 이 걸출한 이야기꾼은 여전히 내 서재에서 명맥을 잇는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런 말을 했더란다. "고귀함, 조화, 균형, 인생의 달콤함, 행복,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작별을 고할 각오를 해야 하는 미덕이자 품위다. 그것들은 다른 시대에 속해 있었으니." 이쯤 되면 그의 유일한 도피처였던 문학을 나 역시 좋아하는 걸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다. 흉포의 시대, 다른 시대를 보지 않고는 버티기 어렵다.


난 사람은 태어나서 죽어도 책은 남는다고 생각한다. 몇 해 전 '헤르만 헤세'와 '윌리엄 포크너'의 사후 50주년을 맞아 저작권이 풀려 출판사들이 대대적으로 전집을 출간한 적이 있다. 소설가는 세상을 뜬 지 한참이라 잊히지만, 놓여난 작품들은 더 활황을 맞았다. 서점엔 세기를 건너온 고전이 드넓은 서가를 가득 메우고 있다. 한 권을 뽑아 만져보면 가끔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마치 탄생석이나 돌하르방을 만지는 것처럼 절로 경애하는 마음이 든다. 마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 압도적이다. 서가에서 훌쩍이며 변태처럼 책을 어루만지자 옆 사람이 자꾸 날 흘겨본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95세 할머니 마고 뵐크가 자신이 젊은 시절에 히틀러의 독일판 기미 상궁이었음을 고백했다. 처음엔 나치 부역자로 몰릴까 봐 두려워 평생 속으로만 앓았다. 그녀에겐 악몽과도 같았던 기억이 되살아날까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그녀는 느지막이 언론을 통해 제 사연을 털어놓았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숲에서 외쳤던 신라의 어느 북두장처럼 개운한 마음이었을까. 그녀의 사연을 신문에서 본 이탈리아 남부 출신의 78년생 작가 로셀라 포스토리노는 이 일을 소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로 집필했다. 이야기는 1943년에 시작된다. 스물여섯 로자는 베를린에서 폭격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남편 고향 마을에 정착한다. 하지만 남편마저 전장으로 훌쩍 떠나고, 시부모님과 오매불망 남편만 기다리며 조용히 살아간다. 하지만 가만한 나날도 잠시, 적에게 독살당할 것을 우려했던 히틀러는 로자를 비롯한 아리아족 계열의 독일 여성 열다섯 명을 기미 상궁으로 고용한다.


젊은 여성들이 겁에 질린 채 히틀러의 음식을 시식한다. 온갖 산해진미가 나와도 심각한 표정으로 죽음을 염두에 둔다. 작가는 음식에 관한 묘사를 최대한 자제하고, 심리적인 허기에 집중한다. 식도를 따라 흐르는 수프와 빵조각은 주책맞게 달콤하지만, 짐짓 모욕을 느낀 로자는 온갖 고민에 휩싸여 속이 시끄럽다. 하루아침에 나치 정권의 부역자로 살아가게 된 자신의 처지를 자괴한다. 남편의 생사는 여전히 불명한데 어느새 포만감에 휩싸여선 남은 음식을 재빠르게 입에 넣기 바쁘다.


소설을 읽다 밖으로 나가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날씨가 아주 따듯해졌다. 채광이 좋은 카페에 들러 찬 커피를 시킨 후 창가 너머로 서성이는 사람을 구경하니 주책없는 허기가 날 습격한다. 소설에 몰입하고 나면 늘 감각이 둔해진다. 현실의 나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할 일이 태산인데 소설을 읽고 싶어서 딴짓만 하다 카페를 나왔다. 오후는 어디론가 흘러가는데 허망한 생각만 남아 아웅다웅거린다. 난 즐거울 게 없는 표정으로 공원을 소요하다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사 온 것을 봉지째 탁자 위에 올려놓고, 늘 하던 대로 팟캐스트를 켜니 이동진의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조르조 바사니'의 이탈리아 소설 <금테 안경>에 관한 얘기가 한창이다. 최근 몇 년 간 나온 이탈리아 소설로 인해 이탈리아반도와 가까워진 기분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그들이 남 같지 않다. 남편도 없이 매일 시식을 위해 출근을 서두르는 일군의 무리가 눈에 선하다.


기억은 편향적이라 엄연한 사실마저 제멋대로 뒤튼다. 우리가 아는 제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재생할 때마다 변형되는 카세트테이프처럼 훼손을 감수해야 한다. 작가 '줄리언 반스'의 말처럼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에 불과하다. 기록만이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95세 할머니의 비극적인 생애에 발언권을 주었다. 마치 일급 변호사를 붙여준 것처럼 당위와 애정을 선사했다. 난 그녀의 기억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엔 관심이 없다.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는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오로지 기억나는 일뿐이라고 했다. 내 초점은 잊힐 게 자명했던 삶을 들여다보고, 지워질 만한 기억을 되새기는 과정에 맞춰져 있다. 역사의 복판에서 애처롭게 떨고 있는 노인의 삶에 서사를 안긴다는 점에 착안한다. 자가 '제임스 설터'는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모든 게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난 수많은 이들이 바쁜 와중에도 굳이 흰 노트에 뭔가를 적는 이유를 짐작한다. 이 세계가 오직 '개츠비'와 '조르바'의 목소리만 기억하는 건 아니라는 위안이다. 그래서 난 매일 아침 가방에 소설책을 한 권 챙겨 넣는다. 불룩한 가방에 이야기를 담고 하루를 버텨나간다. 오늘도 일류 작가는 다시 어둑한 작업실로 돌아가기 위해 막 끓은 커피를 잔에 따른다. 쓸려나가는 누군가의 생을 부여잡으려고 긍긍한 채 어휘를 고른다. 작가 '랠프 월도 에머슨'이 "문학의 쓸모란 우리 현재의 삶에 대한 관점을, 우리가 거기에 디디어 움직이는 버팀목을 얻을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것"이라 했다. 문학은 유효기간이 지나면 폐기될 우리네 삶에 30촉 백열등을 비춘다.


작가 '이언 매큐언'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 중에 창작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를 들려준 바 있다. 그는 작품에 흉부외과 수술 과정을 넣기 위해 저명한 의사에 협조를 구했다. 수술 과정을 직접 목도하고 현실에 가깝게 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수술 당일 일방적으로 일정을 취소해버린다. 그는 굳이 수술 과정을 목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늘 가던 작업실에 틀어박혀 소설에 중요한 대목이 될 수술 집도 과정을 자기 식대로써 내려갔다. 연필로 심장 가슴을 가르고 타자기로 심장 판막을 도려낸다. 그의 말대로라면 소설의 리얼리즘이란 현실을 모사하는 게 아니다. 작품 내에서 내적 필연성에 얻어내는 문예사조로 이해해야 한다. 소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에는 부러 서술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마고 뵐크의 인터뷰엔 남아 있지만, 작가는 굳이 취하지 않고 버린 게 더 많다. 대신 작가는 농담과 낭만을 소설에 첨가했다. 부러 애틋한 로맨스를 끄집어내고, 친구끼리 찧고 까부는 기억을 그러모아 시간의 틈을 찾아냈다. 난 그게 소설이 택할 수 있는 내적 필연성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한다. 좀 더 나아가서 문학이 역사에 속죄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은 비극을 온몸에 두른 여인에게 손을 내민다. 세계의 영원불멸한 고전이 그랬던 것처럼. 난 몸을 굽신거리며 서가를 맴돌다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