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
최근 전원경 작가가 쓴 <클림트>를 읽었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예술가가 살았던 도시를 작가가 직접 걸어보는 기획이다. 전기와 여행서의 비중이 반반으로 섞인 기획이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빈의 링슈트라세 거리, 클림트가 즐겨 찾았던 아터 호수, 이탈리아 도시 라벤나 등을 돌며 그의 흔적을 좇는다. 클림트는 파리에서 인상주의가 막 활개 치던 와중에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독보적인 예술 영역을 구축하여 혁신가라는 칭호를 얻었다.
생전의 클림트를 찍은 사진을 보면 광인 같은 얼굴에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걸 볼 수 있다. 온 동네 여자들이 홀딱 반했다는 그의 거친 매력은 창조를 직업으로 하는 예술가가 지닌 아우라였을 것이다. 그는 긴 시간을 공들여서 한 여인을 그리길 즐겼다. 그의 눈에 들어 영감의 뮤즈가 되고 싶었던 여인은 꽤 많았으리라. 클림트의 그림을 볼 때 나를 마주하는 여인의 시선이 도드라진다. 슬픈 듯 뇌쇄적인 분위기가 공간을 짓누른다. 불변하는 금박이 그녀를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고, 마치 시간 속에 한 인간을 박제하듯 생명력을 움켜쥔다. 그림에 갇힌 여인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얻음과 동시에 당시 거머쥘 수 없었던 주체성을 획득했다. 전희와 관능에 젖은 표정으로 남자를 굽어보는 시선은 도발적이고, 거만하고 여유가 넘쳐흐른다.
클림트는 세간의 오해와 달리 느닷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창조자는 아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초기 모자이크에 일부 영향을 받았고, 장식에 생물학 세포 구조를 새겨 넣어 독창성을 획득했다. 프레스코화를 그리며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당대의 스타 학자였던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역력하다. (클림트의 그림은 죽음과 성이라는 측면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전제로 그린 그림 같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을 보면 도형을 삽입한 작은 조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각지고 둥근 이 도형은 정자와 난자 세포 구조와 유사하다. 당시 클림트는 생물학자 찰스 다윈의 책을 읽고 세포의 구조에 매료되었다. 클림트는 블로흐 바우어의 매력을 번식 능력을 상징하는 정자, 난자와 연관 지어 그렸다. 평생을 공부했던 클림트는 무엇보다 여러 학문에 천착했던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최근 한 큐레이터를 따라 개인 컬렉터가 구매한 작품이 설치되는 걸 보게 됐다. 그때 내가 느낀 건 아 미술이라는 건 어느 정도의 설치 공간을 가진 이들이 소유하는 거구나, 그러니 미술이 재벌과 권력자들에 의해 다뤄지는구나, 그런 생각이다. 미술 재단이라는 곳이 거의 대기업의 소유고, 미술관에 방문하는 우린 구경만 할 뿐 책처럼 사서 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배타적인 구석이 많다. 비록 신진 작가들의 작품이 대중에게 저렴하게 공개되고, 그걸 구입하는 개인 소장가가 늘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림을 구입한다는 건 대중에게 너무 먼 얘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엔 전통적인 액자식 미술을 벗어나, 팝아트처럼 미술이 우리 일상에 너무 널리 퍼져있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현대미술은 어떤 개념으로 우리 일상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난 클림트의 그림이 오스트리아 벨베데레에 있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그의 작품 <키스>를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림 속에 갇힌 연인은 오늘 서울 시내버스 광고판에도 나타났다. 전통의 수호자였던 클림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무수히 복제되어 온갖 상품에 도배된 걸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토악질을 하며 몸서리쳤을 수도 있고, 혁신가라는 칭호답게 신매체의 등장에 대한 자신만의 대응책으로 디지털 픽셀로 그려진 인공적인 이미지에 심취했을지도 모르겠다. 전원경의 <클림트>는 작가의 본거지를 통해 그를 정체를 밝혀내는 책이지만, 클림트의 그림이 그를 알기 전부터 너무도 친숙하다는 데 아이러니함을 느낀다. 우린 그의 그림을 단 한 번도 소유한 적이 없으면서, 클림트의 그림을 내포한 삶을 산다. 사실 대중은 클림트의 인생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한 클림트가 자신에 대해 떠드는 걸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시간 속에서 영원성을 획득했지만, 영원히 미궁으로 남은 그의 신화에 대해 생각해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