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동에서

최승자

by 박민진

며칠 전 친구와 만나 옛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기억이 상충하는 가운데 난 내 기억을 우기기 바빴다. 누군가 헤어질 때 내 모습 같은 거였다. 그들은 헤어짐을 멋들어지게 포장했던 나를 비웃었다. 조롱을 견디기 어려웠다. 난 그들이 말하는 나 자신이 낯설다. 다들 그렇다고 거드는 걸 보니 그게 내 모습이 맞긴 한가 본데 서로의 기억이 이리 엇갈리면 헷갈린다. 다 지난 일이지만, 다 지난 일처럼 깔끔하게 인정하지 못했다. 난 나를 분위기 있는, 뭔가 책과 잘 어울리는 소탈한, 가끔 재능을 보였던 그런 사람으로 기억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녀석들은 그 반대말을 찾는 것처럼 날 놀리며 웃고 떠들어댔다. 난 계속 묻는다. '정말 그래. 그게 사실이야.' 수사에 숨어 있는 내 모습, 이미지, 그것을 둘러싼 어떤 풍경들에 관해 묻고 그것을 상상한다. 그들이 만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나 자신을 만나보고, 요즘과는 현저히 다른 그를 살펴본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길 원했던 걸까. 진짜보다 중요한 건 이제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거다.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어디를 가봤자 똑같을 거 같긴 하다. 그래도 미세한 차이를 지닌 어떤 느낌으로, 오늘 해야 할 것들을 메모장에 적어봤다. 뻔해지지 않기 위한 싸움처럼 느껴졌다.

문득 역 넘어 청파동이 그리워졌다. 최승자의 시를 즐겨 읽을 시절엔 청파동 비좁은 골목길을 자주 걸었다. 도로가 헐고 굽이굽이 휘어져 오른 청파동은 시인의 어휘처럼 곡절이 가팔랐다. 난 시인을 생각할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라는 시를 떠올린다. 시절은 살벌했어도 최승자는 들끓는 시구를 지닌 로맨티시스트였다. 하룻밤 사이에 열 번도 넘게 사랑을 쌓고 무너뜨렸다. 얼얼하고 매캐한 시구에 자주 책장을 덮고 멈춰 섰다. 작가는 청파동의 낡은 골목을 걸으며 스산한 감정을 그려놓길 즐겼다. 한때 연인이었던 이에게 짓이겨진 상태로 좁은 길에서 비틀거리는 몸짓을 듬성듬성 적었다. 치욕과 자괴가 군더더기처럼 매달려있어서인지 성긴 기분에 시달렸다. 떨치지 못해 버티고 서서는 다시 찾아올 낭만을 기대하며 기어코 집에 다다른다. 난 그녀의 시를 읽으며 청파동을 걸었다. 도회지의 휘황한 풍경이 보이는 지대가 높은 골목에 서서 고립을 만끽했다.

나는 다음 수십 년 동안 성공이 불확실한 일에 매달려볼 생각이다. 슬픔과 괴로움 없이 늙기 위해서. 그리고 삶이 끝날 때, 좀 더 나은 생각이 떠오르기를 바란다. 난 내 글이 지닌 패턴을 믿고, 그것이 쌓여 생각으로, 이야기로, 진실로 이어진다고 확신한다. 부끄럽지만 그것에 의지한다. 이런 느낌은 나 같이 평범한 이들에겐 드문 확신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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