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비밀

시크릿 하우스

by 박민진

세상은 뭐든 둘로 나누길 좋아한다. 선과 악, 짜장과 짬뽕, 좌파 우파, 기쁨과 슬픔, 정상과 비정상, 삶과 죽음, 현실과 비현실. 언어로 만져지고 개념이 잡혀야 하니까 거침없이 가른다. 이런 대치 상태는 드라마트루기의 기본과 같아서, 갈등의 축대이자 봉합의 근간이다. 하지만 나는 종종 이것이 문 하나만 열면 서로 왕래 가능한 인접한 세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말하기에 따라 묘하게 다른, 조금 각도만 틀어져도 전혀 딴판인 경계 위에서 사는 건 아닐는지. 그래서 이런 생각을 자주 글로 남겼다. 삶은 오해와 왜곡이 난무하고, 갈등과 번민에 시달리는 게 당연한 거라며 아는 척 폼을 잡았다. 불가지론이 왠지 멋있어 보여서, 난해함에 생의 비밀이 있다며 허무맹랑한 문장을 적었다. 이제 다 휴지통에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예술을 좋아했다. 종일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을 다니는 삶을 바랐다. 지금도 대충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퇴근만 하면 졸린 눈을 비비고 영화관을 찾고, 주말이면 감당이 안 되는 두꺼운 책을 들고 카페에 간다. 스타벅스는 내 지출의 무덤이다. 몇 년 전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묘한 권태가 스멀스멀 올라와서 좀 더 다른 분야를 알고 싶어졌다. 특히 소설을 읽을 때 더 그렇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 문학은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누군가의 속내를 들추지만, 그걸 공감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만날 소설만 읽으니 문학적인 생각에 갇혀 사는 건 아닐까.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뭔가가 더 있다고 생각했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세계의 규칙이 있다고 막연하게 믿어버렸다. 애써 모른척하지만, 분명히 느끼고 있지 않냐고 친구에게 물었지만, 미친놈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느 시점부터 교보문고에서 늘 가던 문학 코너를 지나쳐 생경한 서가에 머무르길 즐겼다. 사회 종교 범죄 의학 심리학 역사, 상관없었다. 그 분야에서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를 뽑아 보기 시작했다. 온갖 분야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한 게 이맘때부터다.


난 내가 실제 느끼지 못하는 건 덮어두고 모르려고 하고, 그걸 읽기를 피곤해한다. 내가 느끼는 고통과 우울함에 관해서만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엄연하다면, 결국 우주에 다다르려는 인류의 일원이라면 뭐든 균형 있게 아는 것이 지성이 아닐까. 이런 자기 암시는 인터넷 서점에서 5만 원 이상을 주문할 때 유용한 주문이 된다. 클릭 세 번이면 책이 결재돼서 집 문 앞에 도착한다. 어머니는 책값은 아끼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은 정신 나간 놈이라고 한다. 난 이제야 책이 많아지려면 집이 넓어야 하고, 나 같은 자취생은 책도 맘대로 사면 안 되는 팔자라는 걸 깨달았다. 책이 감당이 안 되면 초조해진다. 읽지도 않은 책은 팔기도 뭐하다. 결국 내 방바닥에 딱딱한 제목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요즘도 늘 뭔가에 쫓기는 기분으로 책을 읽는다. 큰돈 주고 산 책인데 언제 다 보냐. 소화도 못 할 걸 사들여서 내 불안한 속내를 더 어지럽게 한다. 책들은 인간이 단순치 않음을 말하면서, 세계는 더 복잡하다고 쓰여 있다. 세상에 명쾌한 건 자기 계발서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독서는 혼란을 주었고, 나는 경계에 머무른 상태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바쁘다.

사실 맛보기로 신경의학, 진화심리학, 미술책, 역사책을 들춰보지만, 그중에서 가장 어려운 게 과학이다. 온갖 수식과 공식이 난무하는 그 신비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은 날이 갈수록 공고해지는 중이다. 알면 알수록 첩첩산중이다. 그래도 나는 감히 과학 교양서를 즐긴다고 적는다. 아니 적었다가 다시 고쳐 썼다. 좀 더 알기 위해 용을 쓴다. 과학은 세상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내 주위 사방에서 휘몰아치고 있음을 일러준다. 존재하는데 안 보인다고 언제까지나 그걸 모른 척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상의 이면, 어떤 공간에 자리한 현상을 설명해주는 책을 읽고 위안을 얻어간다. 마치 세상의 이면을 엿보는 것처럼 전혀 다른 얘기를 들을 때 힘이 난다. 과학은 어느 분야에서도 통용되는 만능키가 되어가고 있다. 종교가 대신하던 미지의 영역도 과학이 파고들어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유통된다. 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소멸의 위협을 과학을 통해 어느 정도 두둔하고 있다. 나는 작은 먼지에 불과해, 내 소멸은 광활한 우주에서 진드기가 죽은 만큼의 의미도 없을 거야.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게 있다. 종교는 내게 무책임한 위안이다. 과학은 종교를 대체할 만큼 성장했다. 인간의 머리 위에서 마치 나를 굽어보는 듯 군다. <사피엔스> <총 균 쇠>를 가까스로 읽고 뿌듯해한다. 나도 시야가 넓어진 것 같고, 뭔가 아는 척할만한 잡지식이 생겼으니까. 하지만 읽을수록 느끼는 건, 위대한 석학조차 입증하지 못한 무수한 미시의 세계가 우리 주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 사들인 책이 이백 권은 남았어. 우선 얇은 책부터 읽어보자. 아주 코딱지만큼의 지식이지만, 평소 말하지 않던 현상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책을 편다. 바닥에 떨어진 각질만큼의 지적 허영을 채워간다.

<시크릿 하우스>는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다. 내 오감이 가닿지 못하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소소한 것을 설명하는 과학 교양서 중에서 가장 유머러스하다. 이름은 과학책이지만 공식이 없고, 일상과 밀접해 보이는 것을 모아놔서 친근하다. 데이비드 보더니스는 진드기, 아이스크림, 커피, 스프레이, 향수에 담긴 수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과학이라고 추상화되는 그곳의 존재, 어떤 질서가 있는데, 사람들은 곧잘 공식이나 법칙을 명명해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땅의 문제고 일상의 문제다. 난 <시크릿 하우스>를 읽으며 이 땅, 오늘, 이 현실, 여기 사는 느낌을 다른 언어로 풀어낼 기회를 얻었다.


난 이제 직장을 다니며 겨우 책에 기웃거리는 독자가 됐다. 브런치에 가끔 문학 작품, 과학책, 인문학책에 관한 글도 쓴다. 경계에 갇히지 않고, 혼란의 경험을 고대로 글에 녹인다. 온갖 서사 사이에 서서 세계의 드넓음에 기뻐한다. 완전히 달라 보이는 영역이 실은 서로 느슨히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아가는 게 내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