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이 당신을 들여다본다

잔혹함에 대하여

by 박민진

난 범죄소설로 독서를 시작했다.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을 도서관에서 읽는 재미로 여름을 났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주룩 흘렀지만 도서관만큼은 겨울에 가까웠다. 니트를 챙겨가서 걸쳐 입고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가 돼서야 열람실을 나왔다. 모든 범행의 원인을 사회 구조 탓으로 돌리는 일본 범죄소설은 범인보다는 살인이 벌어지는 도시의 양상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특히 미야베 미유키를 좋아했는데, 그는 피해자나 가해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일류 변호사를 붙여주고 보살폈다. 그의 대표작 <화차>는 한국에서 영화화되어 인기를 끌었는데, 이 작품 역시 극 중 가해자가 파산 신고나 채무 변제에 관한 법을 몰라 사채업자의 추심과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과정을 그린다. 미야베 미유키는 말한다. 정부의 잘못으로 다들 이렇게 팍팍하게 살아서 일어난 범죄이니, 우리 모두 그런 처지에 몰릴 위험이 있다. 작가의 논리는 명쾌하고, 난 이런 소설을 읽다 보면 사회가 좋은 쪽으로 변모하리라 철석같이 믿었다.

요즘은 일본 범죄물을 즐기지 않는다. 계몽적으로 답을 쥐어주는 사회파 미스터리는 이제 순진하게 느껴진다. 쉬운 답엔 진실이 깃들지 않으니까. 범죄는 거듭 복잡해지는데, 답을 구하는 식의 범죄소설을 맘 편히 즐기긴 어려웠다. 오히려 고민이 깊어진 건 잔혹함을 즐기는 태도에 있다. 비극에 빠진 인물은 엄연히 남의 일이니까. 그건 재난 영화를 즐기는 심리와 유사하다. 객석에 앉은 난 저 처참한 광경과 분리되었음을 느끼고 안도한다. 느긋한 한숨이 비어진다.


범죄 관련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는 건, 그 어두침침한 곳에 매혹이 있다는 거다. 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매주 챙겨보는데,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범죄 재연 장면을 즐긴다. 프로그램 특성상 수사 과정을 보여주고 변죽만 울리다가 마는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범죄가 일어난 개요나 상황을 즐기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애청한다. 범죄가 극사실적이고 현실에 가닿을수록 섬뜩함은 배가된다. 내가 범행을 어떤 가책 없이 속 편히 즐길 수 있는 이유는 프로그램이 공익성을 띠기 때문이다. 범죄 예방 목적이 있고, 용의자를 직접 고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안다. 나는 그저 즐기고 있는 거다. 범죄 그 자체를 구경하는 것으로 내 욕구를 풀고 있다. 작가 에드거 앨런 포는 그저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경향을 ‘비뚤어진 악마’라 했다. 사실이든 허구든 범행을 저지르는 걸 구경하고 싶어 하는 건 그 악마성을 즐기는 행위다. 단순히 본다는 이유만으로는 불편함이 없다. 세상 무수한 소설과 영화가 악행을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범행 장면을 자극적으로 그려내 대중을 사로잡는다. 가령 영화 <내부자들> 같은 영화는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지녔지만, 그 묘사 방법은 선정적이기 이를 데 없다. 과연 이 영화에서 성 접대 문화나 팔을 잘라내는 고문 장면이 없었다면 과연 이 정도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카메라는 잔혹함 앞에서 어떤 가책도 없이 눈을 똑바로 뜨고 있다.


구경꾼에겐 정말 악의가 없는 걸까. 악행을 미학적으로 즐긴다는 게 가능할까. 니체가 쓴 <선악을 넘어서>엔 "당신이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라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내 속에 자리한 본능을 삼가지 않고 그걸 그대로 방치할 때 우리 안에 자리한 날 것이 드러날 수 있다. 이 말은 범죄물을 많이 보면 범죄를 저지른다는 얘기가 아니라, 범죄를 우려 없이 즐길만한 오락거리로 치부할 때에 해당한다. 거기엔 일조의 쾌감이 있어 미처 손을 쓰지 못하고 딸려가게 된다. 약간의 가책은 본능처럼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낸다. 다들 그러고 사는 거 아니냐며 부끄럼 없이 항변한다. 그 대신 비난받을 대상을 만들어낸다. 가령, 내게 부여된 격무와 엄격한 선후배 관계가 원인이었다고 탓할 수 있다. 그러면 세상을 이해하는 게 더 쉬워진다. 더 생각할 거 없이 그런 사소한 게 무슨 악이냐고 되묻는다. 의식 없이 저지르는 묻지마 범행처럼, 마음속에 문제의식을 외면하면 창작물도 점점 더 잔혹한 맛에 휘말린다. 점점 더를 외치는 위악적인 면모가 판칠 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문턱이 점차 사라지게 된다.


요즘엔 소시오패스를 다룬 범죄물이 쏟아져 나온다. 아무런 개연성 없는 무차별한 범죄에 탐닉한다. 사회를 탓하지도 않고, 우발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이해에 가닿을 수 없는 명명백백한 악이라 별다른 고민 없어도 된다.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를 쓴 이창무 범죄 전문가는 이 책 서문에서 바이러스처럼 진화하는 범죄는 늘 변하고 있고 그래서 여러 원인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말한다. 동기를 추측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을 때 악은 무섭다. 모파상은 썼다. “외롭게 지내는 시간이면 우리는 그 공백을 유령으로 채우려 한다." 우린 악행의 원인을 찾기 어려울 때 악마를 소환한다. 이해할 구석이 없으면 고민할 게 없다.


난 같은 고통을 느낀 사람들끼리만 아픔을 나눌 수 있다고 믿는다. 진정한 의미의 공감이란 겪지 않으면 가닿을 수 없다고 생각하다 보니, 자꾸 말을 가리게 된다. 어차피 얘기해봐야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럴 때 백지는 감정을 배설하는데 제격이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내 어두침침한 속내를 쏟아놓는다. 그런데도 인간의 논리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 있다. 그건 순간의 느낌에 불과해서 좀처럼 기억할 새 없이 사라진다. 초월한 무언가라 아무리 글로 써봐도 애매한 곳만 기웃거리다 말뿐이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꺼리는 건 인간이 가진 악의다. 악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로로 나오는지 알 수 없기에 모호하다. 철학자 에덤 모턴이 쓴 <잔혹함에 대하여>라는 책을 보면, 우리는 언제나 악의 한가운데 있지만, 악을 말하기를 주저한다. 악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속이 불편한 일이라 손사래 친다. 저자는 악이 잘못과 다른 요인을 혐오감, 잔혹성, 이해 불가능성에 둔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악하지 않을 수 있고, 작고 사소한 잘못이라도 악해질 수 있다. 세상을 복잡하게 하는 건 대체로 선해 보였던 사람이 보이는 악한 행동, 무뢰한으로 보였던 이가 얼핏 펼치는 선한 면모일 것이다. 그건 인간이 가진 특질이면서, 세상을 단순화하여 믿어버린 속아 넘어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