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뉴스로부터,

시선으로부터,

by 박민진

누구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버스 차창은 익숙한 모습을 한 사내를 비춘다. 그는 우두커니 버스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는 중이다. 어제 운동한 삼두근을 의식하면서 힘을 줬다가 뺐다 한다. 난 가끔 행복을 의심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갑갑해하곤 한다. 멋대가리 없는 시멘트 건물에서 나사 볼트처럼 매일 조여지는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삶. 분명 이런 모습을 상상하며 경력을 쌓았는데, 이런 모습에 염증을 느낀다. 일이 경력이 되고, 하루하루가 쌓여 세월이 되면 직위가 나를 규정할 테지. 훗날 내 모습을 상상하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일과 내가 물아일체가 되어 도통 분간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른 모습. 무기력한 순응 속에 어떤 열망이라는 게 있을까. 간밤에 나온 연예인 추문 기사에 눈을 떼지 못하고 댓글까지 읽었다. 연예 뉴스는 여름과 잘 어울린다. 자극적인 말로 가득 채워진 포털 뉴스 목록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뜨거워 보인다. 분노 조롱 무시 항변 열변, 난 비등점을 넘어선 입들을 쓱쓱 밀어 내리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창밖을 보니 늘 지나치는 서울역 부근이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붉은 옷을 입은 무리도, 좌판을 깐 행상도, 여행용 가방을 끄는 분주한 발걸음도 고스란하다. 상전벽해와 같다는 도시의 변화를 좀처럼 체감할 수 없는 건 내가 무뎌져서일까. 떠들썩했던 서울로7017도 어느덧 잊히고, 드라마 미생에서 보던 구 대우빌딩도(현 서울스퀘어)도 더는 애틋하지 않다. 2년 전 임시완 배우와 긴요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내 앞에서 장그래가 말하는 것 같아서 대화 내용보다는 얼굴 생김새를 관찰하느라 버벅거렸던 기억이 난다. 이틀 전 포털 뉴스에서 그는 사회에 기부도 하고 '미담의 아이콘'이라는 별명을 달고 있었다. 사진 속에 웃고 있는 그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잠시라도 나를 떠올릴까. 그러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어떤 장면일지 궁금했다. 부디 별반 다를 게 없는 시시한 건 아니었으면.


버스로 무수한 인파가 그득한 시청 광장을 지났다. 포털 뉴스를 보니 오늘 대규모 집회가 있다고 한다. 문득 저기에 월리를 그려 넣으면 어떨까 상상했다. 일러스트레이터 마틴 핸퍼드가 그린 <월리를 찾아서>를 한때 좋아했다. 요즘도 서점에 가면 종종 들춰보는데 예전만은 못하다. 영국 태생의 월리는 무수한 인파 속에서도 밝은 얼굴로 자신을 찾아주길 기다린다. 숨은 그림 찾기에 가깝지만, 빨간색과 하얀색 줄무늬가 그려진 니트 모자와 스웨터를 착용한 월리를 찾는 게 어렵진 않았다. 정작 내가 관심이 있었던 건 월리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었다. <월리를 찾아라>가 가진 본연의 재미는 유럽 대도시 관광지를 배경으로 한 무수한 인파를 구경하는 것이다. 독자를 현혹하기 위해 존재하는 주전부리지만, 작가의 세밀하고 집요한 화풍 덕에 본말이 전도되어 월리를 둘러한 행인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하나하나가 다 생생했다. 오밀조밀 모여있어도 결코 누구 하나 묻히지 않았다. 쉽사리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제각각의 특색을 지녀서 어여뻤다. 당시엔 잘 몰랐지만 이름 없는 인물에게 그들 각자의 삶을 선사한 작가의 태도는 일견 감동적인 구석이 있었다. 표정과 옷차림, 소지품, 몸짓을 그린 솜씨는 장인에 가까웠고, 그건 마치 네덜란드 화가 대 피터르 브뤼헐이나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 등장하는 터키 오스만 제국의 세밀화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유머를 놓치지 않는 월리를 찾아라는 총천연색 색감으로 인간 세상을 색칠한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회색 도시, 서울 도심과는 딴판이다. 서울도 여느 곳 못지않은 대도신데 난 이 갈등의 뻘밭을 어여삐 볼 여력이 없다. 날 선 표정과 고함이 득실거리는 창밖 풍경을 난 테두리 치고 멀리한다. 작년 이맘때쯤엔 여기에 한데 모여 단축마라톤을 뛰었는데, 올해는 글러먹었다. 다시 창밖보다 평온한 포털 뉴스를 켰다.


내 일상은 늘 18도 정도를 유지한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어제 쓰던 보고서를 이어간다. 커피를 마셔도 무심한 한숨이 비어져 나온다. 동어반복에 가까운 말을 십 년 넘게 써왔다. 웃으며 다가오는 동료에게 퉁명스러운 대답을 하고, 기대가 없는 표정으로 일관한다. 사무실 분위기를 악화일로로 만드는 건 내가 분명하다. 저들은 나를 빼놓고 또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갈 것이다. 말도 없이 눈만 마주치고 내겐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다. ‘맛있게 드세요. 와 나도 운동해야 하는데, 매일 운동하시는 거 정말 대단해요.’ 난 체육관에서 쇳덩이와 씨름하며 그들이 나에 대해 보탤 말들을 생각했다. 난 자발적 혼밥을 택했지만, 기분은 자발적으로 개운해지지 않는다. 버릇처럼 포털뉴스를 켜니 직장생활 중 혼자 밥 먹는 인구 대부분이 위장장애와 역류성 식도염을 가지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거 한국일보 아냐, 웃기고 있네, 망할 통계의 오류.


운동 중에도 짬짬이 포털 뉴스를 읽는다. 어느 저명한 학자가 사뭇 진지한 어투로 인류가 역병의 창궐로 멸하리라 경고한다. 경종을 울리기 위한 말인지, 본인도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무슨 테드 창 소설에나 나올법한 얘기라 흘려들었다. 그는 이 도시가 결코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눈을 치켜떴다. 어디에선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학문 이론이 더 주목받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왜 사람들은 밝고 긍정적인 얘기보다 어두운 저주와 같은 말에 더 혹하는 걸까. 하긴 비극은 문학의 시작이었고, 주말 드라마도 신데렐라 스토리보단 신데렐라가 고꾸라질 때 분당 최고 시청률을 찍는다. 그렇다면 내 브런치는 늘 하강 곡선을 그린다는 측면에서 꽤 성공적인 마케팅을 벌이고 있던 셈이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다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난다는 동료의 속사정을 들었다. 근데 역병으로 인해 미국은 당분간 이민자를 받을 생각이 없다. 무기한의 유예를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요즘 연신 술만 마신다. 자신감 넘치던 눈빛도 탁해지고 말끝도 흐려졌다. 그래도 관료제의 갑갑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그의 포부, 결단력을 가까이서 지켜보자니 질투가 났다. 부러웠으니 졌다. 하지만 내심 다른 생각도 든다. 분명히 안정된 직장을 버린 걸 후회하겠지. '일시적인 권태에 저런 섣부른 판단을 하다니, 애도 아니고.' 나는 내가 택할 수 없는 선택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보호했다. 내 불안을 달래야 했다. 난 저들처럼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배짱이 없다. 그래서 잠시나마 딴청을 피우고 논다. 새벽까지 낯선 이들과 묘한 긴장 상태에서 술을 마시고, 생각 없이 깨부수는 영화를 보며 키득거린다.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막연한 긍정을 좇는다. 부득불 강박적인 웃음으로 현실을 눙치고 나아간다.


포털 뉴스 코너에서 소설가 정세랑의 신작 소식을 듣고, 책을 샀다. 제목은 <시선으로부터,>. 다단한 삶을 살았던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가족이 한데 모여 그녀를 추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특별한 방식으로, 유교 사회가 남긴 찌꺼기를 모두 제거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녀를 기린다. 세상은 그녀를 편의적인 해석으로 대상화했지만, 작가는 심시선이 쓴 글과 가족들이 기억하는 심시선의 이미지로 송장에 살을 붙이고 숨결을 불어넣는다. 너무 밝아서 계속 눈을 마주치진 못했지만, 세간의 말처럼 청량하기 그지없다. 책의 첫 장에는 심씨 집안 가계도가 그려져 있다. 평범한 이름 석 자로 구성된 보통 가족이다. 하지만 각기 하나의 우주를 품은 이들이라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무궁한 가능성이 전모를 드러내고, 곡절을 넘는 궤적이 그려질 때 우리는 문학이 가진 스펙트럼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문학이란 인생 전부를 포용하고 관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까. 그렇다면 포털 뉴스 대신 우선 책을 펴야 마땅한데, 난 거의 모든 세상이 담긴 포털 뉴스를 떠나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