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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05. 2016

우연히 밥 딜런을 마주칠지도 몰라

영화 <인사이드 르윈> , 점점 사라지는 작은 영화관에 대한 생각들

'영화관'이라는 공간성

날씨고 추워지고 술자리가 잦아졌다. 뜨끈한 국물과 밤거리의 풍경이 그리운 계절이 와서 그런가. 회사에선 올해 지나간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하는 이 시기엔 약간의 긴장감이 술자리를 부른다. 퇴근 후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회한을 나눈다. 하지만 다음 날 늘어나는 허리띠에 불안해하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헬스장으로 향한다. 기구 몇 개만 덩그러니 놓인 작은 공간이지만 땀을 빼고 샤워를 하고 나오면 부자가 된 듯 평온한 마음이다. 아직은 집에 들어가기 이른 시간, 나 빼고는 다 분주한 사람들 사이를 오고 가며 스스로 역류함을 느낄 때 도시는 소중해진다. 낯선 동네에서 지하철을 타고 처음 보는 골목길에서 오뎅을 빼먹으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그렇게 도시여행자를 흉내 내며 빈둥대다 보면 난 어김없이 영화관을 찾아 들어간다.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 Davis, 2013

작년에 난 139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봤는데 2번 이상 본 영화를 모두 합하면 156회의 영화관을 다녀왔다. 거의 이틀에 한 번은 영화관을 간 셈이다. 최근엔 영화관이 동네마다 하나씩 있기 때문에 어느 동네를 가든 조금 걷다 보면 멀티플렉스가 보인다. 전철을 타고 내가 좋아하는 광화문 사거리로 가서 시네큐브를 가기도 하고, 종로 골목 구석에 박혀있는 피카다리(이제는 CGV)도 정겹다. 고등학교 땐 지금처럼 영화관이 많이 있지 않았다. 그래서 1시간이 넘는 시간을 4호선 지하철에 몸을 싣고 서울극장에 다녀오곤 했다. 그런 상황에 비하면 요즘엔 영화관이 지천에 깔려 그냥 이리저리 걷다 보면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도 영화를 많이 보고 다니니 같은 사무실의 선배는 내 취미의 쏠림현상에 대해 몇 마디를 하더라. 젊은 놈이 영화관에 처박혀서 침잠하면, 다양한 문화의 섭취나 다채로운 인생의 즐거움을 방기한 것이 아니냐는 그런 소리. 뭐 그런 것까지 참견하나 싶기도 하지만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엔 주말에 등산도 가고, 펜션을 예약해서 여행도 다녀왔다. 오랜만에 친구를 보고 고기도 굽고, 송어 낚시를 가서 코에 찬바람도 좀 넣었다. 오랫동안 치지 않았던 테니스도 뛰어보고, 책장에 묵혀두었던 지루하고 두꺼운 책을 들고 카페에서 졸음과 씨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영화관만 한 곳이 없다. 영화관을 들어가기 전 로스팅된 원두향과 칙칙 거리는 에스프레소 기계소리도 그립다. 영화관에 비치된 포스터를 보는 재미와 영화를 본 후 두들기는 블로그질도 좋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화관을 가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 영화라면 IPTV나 다운로드 서비스를 이용해도 되지만, 난 영화관이 가진 공간성이 더 좋다. 컴컴한 스크린을 노려보는 행위만으로도 다른 세계로 접어드는 몰입의 희열이 있다. 다른 경험으로는 얻을 수 없는 황홀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궁극적인 의식의 차단행위를 통해 현실을 잊고 다른 세상의 날 떠올려 본다도피와 방기를 통해 일상의 변곡점을 만드는 건 2시간의 딴청이다. 


'인사이드 르윈'이라는 물성

최근 가장 몰입한 영화를 떠올려보자면 2년 전쯤 본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이다. 전국에 몇 개관 잡지 못한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 난 종로를 찾았다. 뉴욕의 시린 겨울은 화면에 형형하게 보인다. 그 시큰한 공기에 내 몸마저 움츠러드는데 코트도 없이 기타 하나 달랑 매고 매일 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민폐를 끼치는 르윈은 밉상이다. 무일푼 뮤지션에 얼마 전엔 자기 동료마저 죽어버렸다. 사랑하는 여자는 친구와 동거 중이고, 솔로 앨범은 팔리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이 가치 없는 남자의 노랫소리는 구슬프며 공간을 울린다. 우연히 맡게 된 고양이 한 마리와 다를 바 없는 이 비루한 인생의 끝을 내기 위해 그는 오디션으로 향한다. 이 실패자의 냄새가 가득한 영화에 내가 마음을 내 준 이유는 마지막 장면에 있다. 뉴욕의 허름한 술집 속에서 곡을 끝낸 그는 밥 딜런의 공연을 뒤로하고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그 누군가에게 질펀하게 처맞는다. 일말의 빛도 없이 그를 어둠 속에서 짓이겨 놓은 영화는 구슬픈 밥 딜런의 노랫소리만 남기고 극장 안 어둠으로 사라진다. 

예전에는 평론가들이나 관객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영화를 봤다. 기왕에 영화를 시간 내어 볼 거라면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영화를 봐야겠다는 믿음 때문이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아직도 꽤 많다고 알고 있다. 정보의 시대 아닌가. 그런 유익한 정보는 늘 일상에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꽤 많은 영화들을 봐온 나 같은 경우에 경험으로서 우연히 마주친 영화를 그저 시간에 맞게 보는 행위가 더욱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포스터의 느낌이 좋아서, 우연히 마주친 배우의 눈빛에 이끌려, 한가로운 일요일 우연히 피카다리 극장을 찾아 시간이 맞는 영화를 봤는데 더 좋았던 영화가 있는 법이다. 영화의 인연을 스스로 만들어 나만의 영화로 기록하는 것도 꽤 재밌는 영화보기 방법이다.

영화란 게 일상과 같아서 그렇게 나와 우연이라는 믿지 못할 것과 궁합을 맞추고 나면 더 특별해지게 마련이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의 주인공 르윈은 우연이라는 인생의 묘미를 통해 몇 가지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에서 가장 피해야 할 시나리오 상의 편의적 기법으로 보인다. 우연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필연으로 만든 플롯보다 못하기 마련이니까. 근데 왜 코엔 형제의 영화에는 우연이라는 심상이 필연으로 직조된 각본보다 더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감동으로 다가올까. 코엔의 영화에는 인생이 우연 속에 빚어진 감정을 통해 살아갈 의미를 찾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는 물음에 편의적인 우연이 아닌 르윈이 꿈을 이어 붙이려는 내 마음을 읽는다. 누구에게나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우연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신의 가호로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우연히 본 영화처럼, 우연히 다가온 행운처럼, 우연히 마주친 영화관에서 맛본 커피처럼 인생은 그런 우연을 기대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재미에 머리를 긁고 웃게 된다. 오늘도 우연히 들어간 영화관에서 본 영화에 마음을 내어주고 피식피식 웃다가 영화관을 나왔으면 한다. 내 주말은 늘 그런 일들로 가득한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어둑한 극장 안에서 통기타를 치는 배고픈 밥 딜런을 마주칠지.


'아트하우스'의 우연성

영화를 사랑하는 도시 베를린에는 수많은 영화관이 있다. 서베를린의 중심가 ‘쿠담’이라는 곳엔 스무 개가 넘는 크고 작은 극장이 있었지만, 지금 살아남은 곳은 시네마 파리스와 아스토어 라운지 두 곳뿐이다. 동베를린의 사정도 다를 바 없다. 코스모스, 베누스, 포룸, 뵈어제 극장 등 동독 시절 시민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 극장들이 문을 닫았다. 중심가의 극장이 없어질 정도니 동네 극장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통일 뒤 베를린에서만 무려 40여 개의 영화관이 자취를 감추었다. 멀티플렉스 극장, 인터넷 다운로드, IPTV, VOD 시장의 영향임은 두말할 나위 없겠다. 한국이 천만 영화의 속출과 지속적인 관객 수의 증가로 연일 상종가를 치하는 것에 비하면, 독일은 관객 수의 감소로 더욱 궁지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 역시 다를 바 없다. 극장 수입의 대부분은 팝콘과 콜라가 가져가는 상황에서 멀티플렉스는 관객을 무차별적으로 끌어 모은다. 잘 팔리는 영화가 7 개관 8 개관을 우습게 장악한다. 다양성의 존중이라고 걸어놓은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는 교차상영과 상영시간 조정을 통해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시네마테크를 찾던 사람들은 이제는 사라진 예술영화관들을 보며 한숨짓는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화 환경의 다양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공적, 사업체별로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관객이 설득되지 않는 이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그 지원이 이루어질지 암담한 미래만 그려진다. 교차상영과 이른 아침, 저녁 늦게 상영하는 가혹한 틀에 맞춰진 지금의 예술영화들이 완전히 시장에서 사장되고 나면, 우리는 좋은 영화를 보기 위해 더 이상 극장을 차지 못할지 모른다. 우연에 기대어 영화와의 추억을 기대하는 시네마 키드들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다.

난 서베를린의 작은 영화관이 망한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아트하우스의 존재가 내 눈앞에서 사그라질까 두려울 뿐이다. 내 퇴근길의 행복이, 주말의 여유가, 아트하우스가 주는 근사한 기분이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란다. <르윈 데이비스>라는 영화를 극장에서 마주할 수 없는 상황이 다가온다면 정말 슬플 것이다. 우연 속에서 빚어진 영화와의 추억이 대형 극장의 획일화에 맞춰져 내 기억마저 팝콘의 누런 빛깔처럼 뻔하디 뻔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르윈의 슬픈 노랫소리가 여러 가지 내 머릿속에 생각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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