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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05. 2016

물음이 없어도 난 글을 적는다

영화 <우나기> 그리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당신이 내게 물음을 주신다면

살다 보면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이 질문이야말로 상대에게 대화를 거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나 같은 경우엔 블로그 운영이라고 답을 한다. 사실은 영화감상은 가장 빈도가 높은 여가 거리지만, 워낙 많이 사람들이 영화감상을 취미라는 항목에 넣고 있기 때문에 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영화보기 다음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블로그 운영을 대답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거나, 상대가 별다른 의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말로 묻는 것이 느껴지면 바로 영화감상 및 독서라고 대답해버린다. 나 역시 '별다른 의도 없음'의 카테고리 안에서 응답하는 요령이다. "식사는 하셨어요?"라는 질문에 고등어자반에 시금치를 두고 밥을 두 공기나 해치웠다고 말하는 태도와 '아 예~'라고 대답하는 자세는 엄연히 다른 법이다.

출처 : 옥희의 영화, 전 국민이 사진가라는 현실

내가 블로그 운영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이유는 내가 가진 생각과 관심사를 전방위적으로 토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 적은 내 생각은 특정한 형식에 맞게 정제되어 그럴듯하게 보이게끔 한다. 마치 물건 구입 후 명세서를 받는 것처럼 내 잡념이 어떠한 의미로 포장상태가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짜릿함도 블로그 운영의 묘미가 아닐까. 글이라는 형식에 미달되지 않기 위해 부족한 언어의 조탁 능력을 모두 발휘하며 끙끙거리는 내 모습을 여자 친구는 이해할 수 없는 듯 바라보지만, 실은 글을 읽을 때보다 작성할 때 더 큰 묘미를 느낀다. 하지만 때로는 블로그질이 어떤 의무감으로 작동하여 주기적으로 게시물을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어 중단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이고, 끊이지 않는 노력으로 해온 것이 세상에 영화보기와 블로그 운영뿐이니 그 시간 동안 쌓여 온 애정이 쉽사리 식지 않는다. 권태기는 있지만, 이별은 없다. 그리고 어느새 난 커피숍 한 귀퉁이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며 블로그 속의 내 생각을 정돈해가고 있다.


이마무리 쇼헤이, 영화 <우나기>

사실 고등학교 시절엔 영화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지도 않고, 누군가와 영화에 대해 깊게 얘기할 수도 없었다. 그런 주변머리가 되지 못했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열광하는 친구들의 눈높이가 내겐 따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 역시 친구들과 하등 다를 바 없었기에 그걸 인정하기 싫어 영화에 관한 대화를 일부러 피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삐뚤어진 10대 시절엔 그저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한 영화를 마구잡이로 보고, 가감 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려고 애썼다. 잠자리 이불속에서 결론 내린 내 생각에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제대로 영화를 봤다고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것이 내 나름대로 영화를 섭취하고 즐기는 노하우가 아니었을까. 난 그렇게 영화를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다. 그 당시 봤던 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중 하나가 바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다.

우나기 うなぎ: Unagi, The Eel, 1997

당시 내가 무차별적으로 다운로드하던 p2p 세상 속의 영화들은 대부분 할리우드 영화였다. 내게 가장 익숙한 정서였기 때문이었다. 21세기 들어 한국영화가 부흥기를 맞았지만, 사실 당시의 영화 속 세상의 주류는 바로 할리우드 시네마였다. 액션 하면 제리 브룩하이머 제작의 영화(지금은 우웩이다)였고, 감동하면 톰 행크스(많이 늙으셨다)였다. 모험하면 스필버그(여전하다), 액션 하면 제임스 카메론(그도 여전하다)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런 세상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영화를 섭취하던 내가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됐던 영화 세계가 바로 일본이었다. 우리와 가깝지만 먼 나라였고, 그 당시 보던 야동 속의 황홀경을 동경했던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한국영화의 분위기가 할리우드 따라잡기였다면, 일본은 독자적인 노선이 구축된 미지의 영역이었다. 난 얼떨결에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닥치는 대로 일본 영화를 구해봤다. 그 당시 봤던 영화가 <7인의 사무라이>, <복수는 나의 것>, <동경가족>과 같은 고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말도 안 되는 현대적 감각에 넋을 놓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우나기>를 만났다.

영화 우나기의 스토리는 불륜의 현장을 보고 아내를 죽인 남자가 8년 후 가석방되어 이발소를 차린 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속 작은 마을의 풍경이 여전히 내 기억에 선현 하다. 남자가 움켜쥔 뱀장어의 이미지와 격렬한 섹스신 그리고 살인 현장의 핏빛 이미지가 내 머릿속을 한동안 잠식하고 놓아주지 않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영화 속을 지배했던 정형화된 컨벤션을 모두 뒤엎는 영화적 활력이 그 안에 충만했으니까. 영화라는 것이 단순히 스펙터클과 서스펜스의 산물이 아닌, 이미지와 은유의 산물이라는 것을 그때 가장 먼저 깨닫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마 이 당시부터 새로운 영화적 영역에 대한 거부감이 모두 사라졌다. 또한, 영화감독이라는 사람이 만든 세계관이 현실의 산물을 모두 포용하면서도, 그 설득력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누군가가 만든 서사와 이미지의 세계 안에서 완전해질 수 있음이 그토록 놀라웠던가.


영화적 고자 상태

사람들의 보통 스무 살 이후 감수성이 고착화된다. 좀 나쁘게 말하면 점점 둔해지는 것 같다. 요즘 아무리 많은 사전 지식으로 무장하고 영화를 봐도 학창 시절 당시의 감정적 격정이 피어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뜨거운 돌덩이에 물을 붓듯, 영화 하나에 모든 정신을 빼앗겨 골골거리던 고딩 때의 기분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감수성은 성욕과 마찬가지로 익숙해지면 정신과 육체가 처음만큼 반응하지 않는다. 난 그 뼛속까지 스며들었던 감동을 다시 한번 느끼기 위해 교보문고에서 자극적인 책을 뒤적이고, 종로의 영화관을 가지만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2013년도였나 마지막 날에 본 영화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였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

연말이면서 연초이기도 한 12월 31일 저녁 11시 30분에 시작해서 14년 1월 1일 새벽 1시가 넘어서 끝난 영화다. 남들 다하는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다운 대신, 외롭게 혼자 극장에 앉아 엉겁결에 새해를 맞고 싶었다. 여자 친구와 싸운 뒤의 우울한 기분을 풀 재간이 없어서 했던 행동이다. 하지만 영화가 무척 경쾌하고 맑아서 한 해가 모두 지나갔음을 스스로 자축할 수 있었다. 벤 스틸러의 연출 솜씨는 녹슬지 않았고, 상상이라는 영역을 현실로 맞아들여 해피엔딩을 맞는 설정이 새해를 시작하는 기분과 썩 어울렸다. 그러니까 진정한 행복은 내가 항상 꿈꾸던 영역을 현실이라는 범주 안으로 끌어들였을 때 쟁취할 수 있다는 그렇고 그런 메시지다. 새해가 아닌 평소에 봤다면 조금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 궁극의 낙관에 대해 한소리를 늘어놨을 테지만, 기지 넘치는 벤 스틸러의 활력이 내 새로운 한 해를 응원하는 듯 기분이 좋았다.

월터의 상상이 현실이 됐다는 건, 이건 마치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가 세상 어느 영화 정론지보다 더 유명해져서 모든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난 블로그 운영을 하면서 밥벌이도 하고, 그토록 원하던 명성과 어릴 적 꿈의 쟁취를 실현할 것이다. 취미만은 일과 명확하게 구분 지어야 행복하다는 평소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진행이다. 그러고 보면 취미와 일의 결합이야말로 내가 고등학교 시절 영화를 보고 막 들어간 이불속에서 꿈꿨던 현실의 모습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믿지 않게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사실 상상을 즐겨했던 학창 시절의 나는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며 나를 피워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꿈을 믿지 않았을 때 영화의 재미는 떨어진다. 내가 취미라는 영역에 고이고이 적곤 하는 ‘블로그 운영’이라는 단어에는 ‘영화감상’에는 넣을 수 없었던 ‘꿈’이라는 가능성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은연중에 꺼내어 놓는다. 나의 꿈이 거기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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