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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06. 2016

종로 시네마테크의 추억들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 그리고 이준익 감독과 함께 한 시간

고깃집 알바의 추억들

군에 입대하기 전에 잠깐 고깃집에서 알바를 했었다. 당시 새로 사귄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7만 원을 받았다. 일주일에 삼일을 일하면, 나머지 사흘은 그 돈으로 여자 친구와 놀 수 있었다. 2008년 여름은 정말 더웠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땅 위에서 고기를 나르는 내 모습은 지금도 신기하다. 기운이 넘치던 시절이었던지, 여자 친구가 너무 이뻐서였는지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그렇게 힘겹게 벌어놓고도 무턱대고 돈을 써댔다. 이제 곧 군에 입대한다는 억울함에 더 몰입해서 놀았다.

당시 일했던 가게는 안양 인덕원역 옆에 있는 큰 고깃집이었다. 가게 이름이 숲 속의 포도원이라고 붙여져 있었는데, 가게 옆에 주인이 소유한 땅에 여름마다 포도를 키워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 손님들은 가든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덤으로 싱싱한 포도도 맛볼 수 있는 근사한 식당이었다. 나 역시 손님으로 찾았다가 그 가게에 반해 알바에 지원했던 것 같다.  내가 가게를 찾았을 땐 알바를 구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막상 내가 찾아가니 바로 채용해주셨다. 하지만 그 근사함이란 손님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막상 일하기 전까지 몰랐다. 지긋지긋하게 몰려오는 손님들이 좀비처럼 보이고,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포도밭에 불을 지르고 싶어 진다. 그 당시엔 일이 그렇게 힘들면서도 이틀 후면 보게 될 여자 친구에 대한 생각에 때문에 발끝이 얼얼할 정도로 일을 했다.

가게의 여사장님은 유독 나를 이뻐해 주셨다. 나이도 어렸고, 젊음이라는 막연한 긍정을 북돋아주었다. 학비를 모으다고 뻥을 치고 일해서였는지 내가 군 입대 전에 돈을 버는 것도 기특해하셨다. 일일 매상이 천만 원이 육박하는 가게를 경영하면서도 여사장님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에겐 대체로 모질게 대했다. 나는 알바비 이외에 웃돈도 받고, 실수해도 용서를 받았던 것에 비하면 실로 박한 처사라 할 수 있었다. 멀쩡하게 설거지하는 직원에게 물을 많이 쓴다고 모라고 하는가 하면, 밥을 늦게 먹는다고 나이 지긋한 숯불을 가는 노인에게 대놓고 눈치를 주기도 했다. 그 당시 내가 나이를 먹지 않은 게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구나 생각했다. 남의 돈 타 먹기가 얼마나 힘든지 처음 경험했던 것 가탇. 

당시의 경험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난 항상 식당에 가면 종업원이나 사장님에게 친근함을 느낀다. 특히 나이 드신 식당 직원들에겐 항상 힘들 것이라는 막연한 동정심이 생긴다. 아무리 불친절하고, 서비스가 맘에 들지 않아도 직원들을 핍박하는 사장 앞에서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만 앞선다.



시네마 테크의 추억들,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

당시 주말 알바를 하면서도 고된 몸을 이끌고 시네마테크를 찾았다. 그것이 내가 이 주말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재미였으니까. 평일엔 여친과 노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종각역에 내려서 서울 아트시네마까지 걸어가는 길이 그렇게 신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네마테크의 기억이라면 이준익 감독이 사회를 맡았던 GV 행사였다. <시네마테크와 친구들>이라는 행사명으로 명사가 추천한 영화를 같이 보고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이준익 감독은 <토요일 밤의 열기>를 왜 추천했느냐는 관객의 질문에 "젊음이라는 풋풋함이 사랑이라는 거대한 명제를 만나 어찌할 바 몰라 서투른 객기를 부리는 장면들을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춤을 사랑하는 건달(존 트라볼타 분)이 없는 돈에도 모든 것을 사랑에 헌신하는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돈도 없으면서 춤이나 추러 다니고, 여자를 그저 섹스 상대로만 보는 그런 젊음이 뭐 그리 좋은지 공감하지 못했다. 그저 춤 하나는 정말 신명 나게 추는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역시 춤을 추려면 팔다리가 저렇게 길어야 하는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만 했다. 영화에서 주인공 토니(존 트라볼타)는 브루클린 내의 이태리인 거주 지역에 산다. 여러 달째 백수로 지내다 결국 페인트 가게에서 알바를 하며 돈을 번다. 그가 돈을 버는 이유는 단순히 춤을 추고 섹스를 하기 위해서다. 그런 그를 완전히 넋 나가게 만든 여자가 있으니 바로 도도한 맨해튼 여자 스테파니다. 늘 자신에게 매달리는 여자들을 뒤로한 채 자신을 무시하는 이 도시 여자에게 완전히 뿅 간 토니는 그녀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하지만 그녀를 완전히(끝을 보지는) 얻지 못한다. 이유는 그녀가 돈과 성공을 꿈꾸는 야심이 있는 여자의 캐릭터를 가졌기 때문이다. 뉴욕의 전문직 중산층을 꿈꾸는 스테파니는 토니와는 다르게 춤을 좋아하면서도 직장과 남자 친구에게 숨긴다. 그리고 주말이 끝이 나면 언제나 그래 왔듯 맨해튼의 알파걸이 되기 위해 다른 가면을 쓴다.

<토요일 밤의 열기>는 젊음이라는 가능성과 우아한 춤의 기억이 영화 전면을 차지하는 영화다. 또 반면에 화려한 무대 뒤로 숨어있는 잔인한 현실의 조건들을 모른척하지 않는다. 진짜 성공하는 놈은 맨해튼에서 돈을 벌고, 인생을 즐기려는 젊음들은 결코 한가로운 미래를 꿈꾸지 못한다. 뒷골목 차 안에서 금세 후회할 섹스를 하지만, 토니의 그녀 스테파니는 결국 도시로 돌아가 자신의 미래를 찾아 나선다. 영화의 초반 페인트 가게에서 일하던 토니는 잔업이 남은 상태에서도 퇴근을 하려 한다. 디스코장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스페파니와 춤을 출 수 있는 오늘의 무대야말로 그 당시엔 모든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장은 말한다. "오늘 이대로 가면 다시는 출근하지 말라"라고. "어차피 페인트 가게에서 일할 청년은 많고, 사장 입장에선 아쉬울 것 없다"는 얘기다. 그 말마저 무시하며 가게를 나서려는 토니를 붙잡고 사장은 한 마디 더 붙인다.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는  기성세대의 간곡한 눈길이 토니를 향한다. 하지만 토니는 이내 그 마음을 모두 받지 않고 디스코장으로 궁둥이를 흔들며 걸어간다. 그리고 가게 안에서 떠나간 토니를 애처롭게 쳐다보는 눈길이 있다. <토요일 밤의 열기>는 내 기억 속에서 그저 춤을 찬송하는 가벼운 영화로 보였었다. 하지만 조금 나이를 먹고 나자 이 영화엔 우려하는 기성세대와 아직 깨닫지 못한 흥겨운 아이들의 경계가 존재하는 영화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가치 판단이 끊임없이 보는 이를 자극한다. 시네마테크 구석자리에 앉은 나는 울적해진 기분으로 토니를 향해 혀를 찼다. 그리고는 어느새 스스로 어른이 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하루 벌어 하루 데이트를 했던 그 당시만큼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을까 싶다. 고깃집에서 세상 맛을 살짝 보며 짐짓 심각해지기도 했지만, 내겐 오늘의 노동과 내일의 유희가 5대 5로 자리 잡았던 공평한 세상이었다. 스쳐 지나갔던 올드한 영화를 다시금 극장에서 보게 해주신 이준익 감독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오랜만에 찾은 낙원상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주고 있었고, 아직도 영화가 일상에 주는 행복이 생각보다 더 크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 자리였다. 아 시네마테크에 가본 지가 도대체 언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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