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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10. 2016

날 미치게 하는 야구

영화 <날 미치게 하는 남자>, 보스턴 레드삭스와 김병현의 추억들

보스턴 레드삭스의 우승과 김병현의 몰락

올해 시카고 컵스의 108년 만의 감격적인 우승을 지켜보며 오랜만에 재밌는 월드시리즈를 본 느낌이었다. 과잉된 경기장의 분위기, 팽팽한 긴장 속의 투수전, 간헐적으로 나오는 홈런포까지 시리즈의 수준을 한껏 올려놓았다. 개인적으로는 보스턴의 밤비노의 저주가 깨지는 광경을 본 이후, 불과 12년 만에 염소의 저주까지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광경을 목도한 것이다. 베리 본즈의 홈런 신기록과 박찬호와 김병현의 황금시대만큼 의미 있는 순간들과 함께 한 기분이다.

2004년 보스턴 우승 당시 흥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시절엔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줄줄 외울 정도로 팬심이 깊었다. 04 시즌엔 박찬호가 텍사스에서 오랜 부상으로 부진하던 시절이라 내 관심은 오로지 명가 보스턴에 있는 김병현에 가 있었다. 애리조나 D백스에서 랜디 존스, 커트 실링 듀오와 함께 극적인 우승을 하고 거액의 연봉으로 보스턴으로 이적한 김병현의 슬라이더는 최고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 시점부터 김병현은 과거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오랜 부상과 부진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보스턴에 김병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경기 시작 전 팬들의 쏟아지는 야유에 자존심이 크게 상한 김병현은 관중석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쳐든다. 

가운데 손가락을 편 남자 김병현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는 그린몬스터로 유명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구장이다. 거기에 보스턴 시민들의 야구사랑은 멧 데이먼과 밴 에플렉을 비롯한 할리우드 스타들이 보증하듯 유독 더 유별나다. 거기에 그 작고 굵은 손가락이 활짝 펴졌을 때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난 생방송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그 순간 김병현의 보스턴 생활이 종결되었음 알았다. 또한 김병현의 남은 메이저리그 생활도 녹록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야말로 내 메이저리그 역사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게 겸손을 몰랐던 김병현표 프리즈비 슬라이더도 사라졌고, 2회 우승의 명성 역시 악동 이미지에 날아가고 없어졌다. 마치 장난처럼 보스턴이 밤비노의 저주를 풀어낸 그 해에 김병현은 손가락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아직 국내에서 선수생활을 연명하는 김병현은 여전히 그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속되는 부진과 굳어버린 표정이 현재 김병현의 위치를 말해준다.

김병현은 현재 기아에서 뛰기까지 박찬호보다 명성이나 기록에서는 뒤질지 모르지만, 그 전성기만큼은 세상 어느 선수보다도 화려하게 장식했던 선수다. 늘 건방진 태도와 거리낌 없이 정면 돌파하던 공격적 성향으로 그는 많은 팬을 몰고 다녔다. 김병현 덕분에 메이저리그를 향한 시선이 서부 LA지역에서 동부의 양키즈와 보스턴으로 옮겨갈 수 있었고, 그 해 보란 듯이 보스턴은 양키즈에 챔피언십에서 최종 스코어 4-3의 대 역전극을 펼치며 월드리시즈에 진출했다. 그 시리즈의 재미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완벽한 드라마였다. 커트 실링의 피 뭍은 양말, 매니 라미레즈의 우스꽝스러운 외야 수비, 데이비드 오티즈의 그린몬스터를 넘기는 홈런,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구위, 양키즈와 보스턴의 벤치 클리어링 도중 배시시 웃고 있는 김병현의 미소까지 내겐 일종의 추억처럼 기억되는 순간들이다.

날 미치게 하는 남자 Fever Pitch, 2005

어느 보스턴 광팬의 여성 판타지, 영화 날 미치게 하는 여자

내게 보스턴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있다. 패럴리 형제의 <날 미치게 하는 남자>(원제: fever pitch, 병적인 광분 상태를 뜻한다)다. 이 영화는 설정이 재미있다. 보스턴 광팬인 남자 벤(지미 팰론 분)은 매일 경기장을 가느라 여자를 사귈 시간이 없다. 그의 생각에 여자와 야구를 즐기긴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능력 있는 비즈니스 우먼 린지(드류 베리모어 분)를 만나며 그는 하나의 판타지를 갖게 된다. 바쁜 그녀가 일하는 시간에 야구장에서 보스턴의 경기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이다. 여자는 늘 바빠 함께 있어주지 못하니 벤에게 항상 미안해하고, 벤은 그녀의 일을 인정해주고 야구장에서 맥주나 마시면서 경기를 보면 된다. 그렇게 이해관계가 맞아서 사귀게 된 두 사람은 잠시나마 평온한 관계를 지속한다. 남자는 칼퇴근이 가능한 교사라 매일 보스턴의 야간경기를 보러 다니고, 늦게 퇴근한 여자 친구는 그의 방에 들려 잠자리를 함께한다. 실로 더러운 패럴리 감독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이 말도 안 되는 설정 안에서 티격태격하는 야구 유머들이 즐겁다. 프랑스에 같이 가자고 하는 여자에게 주말 양키즈와 라이벌전을 봐야 한다며 어깨를 으쓱하는 장면, 여자와 격정적인 섹스 후에 보스턴의 기적적인 역전승을 목격하지 못했다며 스스로 자책하는 남자의 얼굴. 영화의 포커스는 연애가 아닌 야구에 가 있다.

날 미치게 하는 남자 Fever Pitch, 2005

야구중계를 TV에서 보다가 가끔 연인이 야구장 데이트를 즐기는 걸 목격할 때가 있다. 화기애애한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경기에 집중하는 남자와 야구장의 분위기에 취해 셀카만 연신 찍어대는 여자를 볼 수 있다. 화면 속 그들의 행복은 오래갈 수 없다. 왜냐면 야구장에서만큼은 남자의 모든 주의력은 여자가 아닌 야구에 가 버릴 테니까. 유구한 전통의 미국 야구의 재미는 바로 확률과 통계에 있다. 축척된 데이터로 이런저런 통계와 함께 그게 맞아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관중들을 열광한다. 야구시합은 투구의 피칭을 기준으로 100구를 환산한다면 100개의 상황과 직면한다. 1구 1구를 던지기 전마다 판단을 해야 하는 순간이 생긴다. 그때마다 수 천 가지의 전술이 떠오르고, 그 판단은 과거 사례를 통해 확률적인 접근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야구는 통계의 스포츠고, 그 통계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하며, 남자들은 그 전략적 방식에 환장하는 족속들이다. 옆에서 여자가 쳐다봐봤자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귀에 들어온다. 바로 ‘겨울남자, 여름남자’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남자는 야구 비시즌인 겨울 스토브리그엔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남자가 된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면 여자 친구는 뒷전이 된다. 여름에 날 좀 따듯해지면 야구에 미쳐 정신을 못 차린다. 린지는 벤에게 “겨울남은 오케이지만, 여름남은 감당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날 미치게 하는 남자 Fever Pitch, 2005

결국 벤과 린지에게 위기가 닥쳐온다. 본인보다 야구에 더 큰 삶을 할당하는 벤을 이해하지 못하는 린지는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급작스런 이별에 친구들과 술집에서 불평하던 벤은 당시 연패에 몰려있던 보스턴의 주축 선수들이 시시닥 거리며 술집에서 웃고 있는 걸 보며 분개한다. “양키즈한테 깨져놓고 웃고 떠들어.” 이 순간 남자는 문득 여자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나는 킥킥거리며 영화를 보며 이 지독한 야구 연애 영화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모든 게 보스턴 레드삭스 위주로 펼쳐지는 이 연애담에 로맨스란 끼어들 자리조차 마련할 수 없다.

<날 미치게 하는 남자>의 원작은 제목이 'Fever Pitch'이다. 이는 원래 영국 런던 연고의 축구구단 아스널 FC의 광팬인 원작자 닉 혼비의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 열한 살에 처음 가본 축구장에서 아스널 팀에 홀딱 반해버린 후, 평생을 축구장에서 웃고 울던 소년의 이야기다. 영국이 축구에 미친놈이 많다면, 미국은 야구에 미친놈이 많다는 사실을 활용해 아스널을 보스턴 레드삭스로, 축구를 야구로 바꿔서 적절하게 녹여 넣은 각색이 흥미롭다. 영국이 훌리건들은 수 십 만원을 호가하는 티켓을 손에 쥐려 예매 전쟁을 벌이고, 골 좀 못 넣는다고 입에 담기 버거운 저주를 선수에게 퍼붓는다. 세계 어느 나라의 남자들이나 스포츠에 열광하고, 그 괴물 같은 녀석들을 사랑하는 여자들은 남자들을 보며 한숨짓는다. 한국에서도 자주 보지 않는가. 골프 하느라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인간, 내기 당구에 빠져 당구장에서 폐암에 걸렸다는 인간, 바둑에 빠져 기원에서 젊은을 탕진하는 인간까지 셀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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