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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31. 2016

숭고한 노년에 대하여

영화 <다가오는 것들> 그리고 나이듦의 고민들

영화 ‘다가오는 것들’ L’avenir, Things to Come, 2016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무언가를 그려낸 영화를 보고 나면 벅찬 느낌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리한다. 그건 세상은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경외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들춰봐야 할 것들에 대한 지적 허영심이 날 불안하게 한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샤토브리앙, 루소, 아도르노, 솔제니친, 호르크하이머, 부버 등 평소 관심도 없는 여러 사상가의 문언들이 영화 곳곳에 등장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철학교사이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가 지적인 사유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전가의 보도 같은 얘기지만 어느 예술이 그러하듯 당신의 부박한 삶에 당대의 철학적 사유들이 구원의 동아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서가에 꽂힌 한 권의 책이 위기에 처한 당신을 구해낼 수도 있다. 그런 마음으로 수많은 물음표가 처진 이 영화를 요리조리 살펴볼 생각이다.

L’avenir, Things to Come, 2016

사상적 기반이 무너지던 밤 

열심히 걷고 뛰고 삶을 즐기는 나이 든 여자 ‘나탈리’는 미래(다가오는 것들)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녀의 일상은 두 아이의 엄마로서 시작해 철학교사, 철학서의 작가, 늙은 노모의 딸, 같은 철학교수인 남편 하인츠의 아내, 중산층이자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일까지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해 보인다. 이런 역할을 위대한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분하고 있어서인지 아름다움이라는 말의 어감을 넘어 상적인 삶을 자랑한다. 그런 그녀에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떠나가는 것들이 하나둘씩 생긴다. 20년 넘게 해로한 남편의 외도, 두 자식의 독립, 늙은 노모의 죽음, 오랜 시간 동안 헌신한 교과서 집필진에서의 탈락 그리고 그녀가 오랜 시간 가꾸던 정원(추억)과의 작별이 그것들이다. 여자는 40살이 넘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한심한 치들은 여전하다. 그녀의 가려진 두 귀에 던져지는 말들이 더없이 가혹하게만 느껴진다. 시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듬성듬성 비어버린 서가처럼 그녀가 믿던 세상까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는 학생들은 그녀를 썩은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비겁한 지식인으로 취급한다. TV에서 열심히 변명을 해대는 ‘사르코지’나 부츠를 신고 침대에서 기행을 벌인 ‘시라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그녀를 대한다. 내내 덤덤하던 그녀는 침대에 누워 늙은 고양이를 어루만지며 스스로 다독이는 눈물을 흘린다.      


상처의 치유가 필요했던 나탈리는 아끼는 제자 파비앵이 친구들과 함께 농장 생활을 한다는 소식에 친히 방문한다. 급진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그들은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고 매일 토론을 벌인다. 스스로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믿고 있던 나탈리는 파비앵이 급작스레 자신을 문서에 사인이나 하며 젠체하는 보수적인 엘리트 지식인으로 취급하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도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로 살며 소련에서 솔제니친의 정신을 찾았던 사람이지만, 그런 시간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급진성을 논하기엔 너무 늙었다. 예전에 이미 다 해봤다.” 이제 늙어버린 그녀는 그저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더 큰 가치와 더 큰 변화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이 영화를 인상적으로 본 것은 삶의 충격에 대응하는 그녀의 덤덤한 태도다. 현시점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로서는 그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을 택한다. 그리고 낡은 차에서 듣는 ‘우디 거스리’의 포크송과 젊은 친구들이 내는 변혁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세상의 변화에 스스로를 다독이기 시작한다. "애들은 독립했고 남편도, 엄마도 떠났지.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 놀라운 일이야." 손실과 함양을 동시에 취하는 그녀의 태도는 존엄한 노년을 고민하는 내게 희미한 빛처럼 다가왔다. 나탈리의 책장에 새롭게 채워질 다른 철학서들은 무엇일까. 유나바머를 실천적 지식인으로 믿는 젊은 친구들이 나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늙은 지식인의 역할일 것이다. 또한 내가 지하철과 카페에서 읽는 책들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도 그녀에게 중요하다.


결국은 혼자 걸어가는 삶     

영화는 뻔한 맺음을 거부한다. 그녀는 다시 집으로 찾아온 남편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혼을 자책하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비수를 꽂은 파비엥의 집에 다시 방문해 완전한 독립을 기념이라도 하듯 어머니의 검은 고양이를 선물한다. 이제 그녀는 혼자다. 요즘 TV나 언론과 SNS에서 혼자서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하는 글들을 자주 본다. 이 험하고 거친 세상 혼자서 어떻게 버텨나갈지, 자의든 타의든 싱글들이 도시의 3할 이상을 차지하는 현시점에서 걱정이 앞선다. 난 그들에게 나탈리를 보여주고 싶다. 그녀가 혼자가 되면서 견지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그건 자기 고집에 귀를 막은 늙은이의 부박함도 아니고, 스스로 젊은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자책하는 삶도 아니다. 나탈리는 적당히 듣고 스스로를 간직한 후 매임 없이 유려한 걸음을 이어나간다. 지적인 품위를 갖춘 그녀를 생각하고 또 적어보는 이유다.


이 영화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보수의 가치를 논할 때 제시하고 싶은 영화이다. 급진과 변혁의 가치가 버거운 기성세대는 젊음의 방기를 경계한다. 그로 말미암아 시대가 구축한 사상적 기반에 균열이 났을 때 적당한 지점에서 타협을 보는 것이 지금 시대의 보수가 가진 가치일 수도 있다. 한 인간이 오랜 시간 천착했던 이론에 스스럼없이 균열을 내고, 새로운 시각에 건전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면 좀 더 단단하고 굳건한 노인이 될 수 있진 않을까. 이제 젊음의 한 고개를 넘어가는 지금 영화는 기시감있는 미래를 그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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