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Oct 27. 2016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村上春樹 雜文集, 2011)

하루키의 수필을 읽으며 그의 삶을 답습하는 나의 모습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村上春樹 雜文集, 2011)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수십 년간 집필한 잡글들을 모아놓은 책 <잡문집>을 읽었다. 처음엔 아 이런 글들로도 돈 벌 수 있으니 좋겠다고 생각했다. 약간 샘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몇 줄 힘없이 불평만 해댄 것 같은데, 도무지 읽어봐도 문장 하나 좋지 않은데 말이야. 하루키가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비롯한 전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이 이 잡문들을 읽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村上春樹 雜文集, 2011)

하루키는 자신이 펴낸 문학 작품들에 작가 자신의 자의식을 깊숙하게 투영하는 작가다. 라이프스타일, 취향, 일과, 정치적 견해까지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쩌면 하나의 하루키이기도 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두부를 구워 먹고 쉴 새 없이 달리다가 오전 내내 글을 쓴다. 오후엔 재즈나 실컷 듣다가 저녁 8시만 되면 잠이 드는 이 영감탱이의 인생이 뭐 그렇게 흥미롭겠냐만, 난 그의 글을 읽고 또 읽는다. 거기엔 어쩌면 내가 다다르지 못한 이상화된 패턴이라는 게 있다. 정확히 일과를 지키고, 크게 욕심내지 않으며, 속된 것을 멀리하는 그런 삶의 자세가 가진 패턴을 동경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수필들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다자키나 <1Q84>의 덴고나 하루키가 펴낸 수필집 속 대상화된 하루키나 크게 다를 바 없다. 늘 꾸준하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지치지 않는 일과의 반복이 독자를 평온한 세상 안에 안착시킨다. 하루키는 미스터리의 구조 속에 독자를 넣어두고 요리조리 시험하지만, 그가 늘 도피하는 곳은 혼자서 책을 읽고 스카치 한 잔 하는 조용한 방이라는 사실이 날 안심시킨다. 어쩌면 난 하루키가 만들어낸 규칙적 패턴을 돈 주고 사 읽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키가 가장 최근 집필한 장편소설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이 블로그에도 하루키에 대한 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직간접적 언급을 제외하더라도 내가 쓰는 글의 어투에는 하루키 수필이 가진 심심함을 동경하는 맘이 녹아있다. 최근엔 부쩍 일본 사회와 정치, 세계의 조류에 관한 생각을 적는 하루키지만, 난 어릴 적부터 문단이 싫어하는 글을 쓰고, 영미권 작가들에 영향을 받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글을 쓰며 유유자적 사는 하루키의 인생을 부러워했다. 제도권의 편입을 거부하고 일본 문단에서도 엘리트 코스와는 별개의 독자적 노선을 구축한 점에서 그는 기타노 다케시, 이와이 슌지와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고양이를 친구 삼아 재즈와 소설을 취미 삼아 여행하며 달리기를 마치 장신구처럼 지니고 사는 그의 방식은 유난히 집단문화가 강한 동아시아에서 더 큰 힘을 얻는다.


언더그라운드

잡문집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아무래도 하루키의 어두운 논픽션 <언더그라운드>에 관련된 주석들이다. 집필 당시의 심적 부담감을 토로한 지점에서 하루키 답지 않게 무거웠다. 1995년, 출근길 늘 전과 같았던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살포한 사린가스로 수천 명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이 사건은 당시의 떠들썩함보다, 사건 이후의 적요함이 하루키의 내면을 혼돈에 몰아넣었다. 일본이라는 작고 조용한 세상을 다시 보게끔 했다. 크나 큰 비극을 앞에 두고도 영문을 몰라 어제와 다르지 않은 일과에 숨죽이고 사무실을 채운 도시인들. 영문을 몰라 어딘가에 묻고 싶지만 별거 아니라는 세상말에 굴종한 작은 주택가. 세상과 거리를 둔 상태에서 주류에 섞여 들길 거부했던 하루키가 작가로서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는가를 고민하게 된 사건이다.

일본의 옴진리교는 사린가스를 출근길 도쿄 지하철에 살포하여 도시를 혼돈 속에 몰아넣었다.

그가 유럽의 그림 같은 집에서 커피 한 잔과 함께 글을 쓰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생계에 시달리는 선량한 이들을 해치는 세력이 있다는 것에 작가로서 자괴감을 느꼈으리라 짐작한다. 관망과 관조가 어울리는 하루키적 패턴이 현실세계와 멀어졌을 때 세상은 그 비틀린 형체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만 사회적 관계를 갖고 살겠다는 마음에도 죄책감이 끼어든다. 세상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복닥거리는 관계망의 틀 안에서 서로에게 살의를 가지게 되었고, 하루키처럼 성공하지 못한 개개인은 침범당한 개인주의를 복구하지 못한 체 고통받는다. 그리고 이제 그 역효과가 사회면을 통해 삐져나온다. 나 역시 이 사건과 관련된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만나 인터뷰한 글을 읽으며 사람 속이라는 게 우리가 우연히 스쳐 지나가며 무표정으로 마주한 것과 다르게 참혹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한 종교단체가 세상을 종말을 꿈꾸었을 때, 하루키는 전과 다름없는 평온한 하루를 끝마쳤다. 나 역시 911 사건을 TV로 시청한 후 누군가와 즐거운 점심 식사를 가졌다. 동정과 공감이 없는 인류는 도시화라는 매끈한 포장지 안에 썩어가는 내장을 참지 못하고 토해낸다.


포트레이트 인 재즈

최근에 <포트레이트 인 재즈>라는 하루키의 오래된 재즈 에세이 읽고 있다. 재즈는 최근에 부쩍 애정을 가지고 있는 하루키적 취미 중 하나인데, 그의 소설에 나온 곡들을 중심으로 재미를 붙여가는 중이다. 누군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개인주의자라고 하루키를 칭하던데, 다른 건 몰라도 아마 내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일과를 보내는 남자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포트레이트 인 재즈>는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불세출의 명반이기도 하고, 하루키 재즈 에세이 제목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한 작가의 인생 스타일을 읽고 따라 하고 그대로 답습하는 재미를 느낀 사람은 내게 딱 두 사람이다. 앞서 적은 대로 하루키가 그렇고 또 한 사람을 고르자면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다. 그의 블로그, TV 프로그램, 팟캐스트, 저서, 인터뷰집, 잡지 기고글, 유튜브의 동영상까지 가리지 않고 반복해서 듣는다. 어쩔 땐 내가 하는 사고방식이 나 자신의 것인지, 이동진의 생각을 모방한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게 나쁘게 느껴지진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수필의 가장 긍정적인 작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으려나. 좋아하는 마음의 최대치는 모방 아니던가. 하루키의 재즈를 청하며 잠을 이루는 밤에 스스로를 다독이다 보면, 세상은 밤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다 새벽이 되면 곧 하루키의 기상시간이라는 생각에 조급함을 붙들고 잠을 청한다. 그와 나 사이의 시차를 생각하며 갸우뚱한다.


작가의 이전글 시트콤의 대가 김병욱의 작품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