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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27. 2016

시트콤의 대가 김병욱의 작품세계

김병욱의 시트콤과 영화 잉투기가 가진 쇄말성(trivialism)의 기운

내게 김병욱의 시트콤이란

시트콤 <감자별>은 내 하루의 청량제 같은 시간이었다. 하루의 위로, 중독 같은 습관이다.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 <감자별>은 평일 늘 같은 시간에 시작했다. 혼자 사는 나는 그저 일과를 마친다고 모든 게 끝나지 않는다. 어제 어질러놓은 방 청소도 해야 하고, 빨래도 돌려야 한다. 설거지도 있고, 그걸 다 정리해야 몇 안 되는 반찬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 운동까지 하고 온 날이면 더더욱 지친다. 퇴근 후의 집 안 공기가 냉랭하지만, 그래도 내가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감자별이 주는 단순한 세상이 주는 웃음 덕분이다. 난 감자별이라는 세상 속의 모든 일들이 내가 사는 세상과 멀찍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들을 통해 위로받았다.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더할 나위 없는 기분을 만끽한다.

시트콤의 대가 김병욱 PD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자란 친구들에겐 유년시절부터 TV는 어쩔 수 없는 절친이다. 빈 집에 TV를 틀어놓는 것만으로 아늑한 기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김병욱 피디가 만든 시트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일상을 별 탈 없이 수습하고, 자그마한 기쁨과 슬픔에도 오버해서 반응한다. 그 손쉬운 희로애락의 세상은 복잡한 세상사를 보기 좋게 단순화한다. 집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컴컴한 현관과 내가 불을 켜야만 맞아주는 시들어버린 가구들을 애써 모른척하고, 김병욱의 시트콤이 만들어낸 대가족의 아늑한 품으로 다가가 함께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
난 김병욱 감독이 세상에 알려진 98년작 순풍 산부인과부터 그의 팬이었다.(좀 더 나아가면 그의 데뷔작 SBS 천일야화부터 팬이었다.) 손 빠지게 기다린 것도 아닌데, 그의 작품들을 모조리 보며 자랐다. 개인적으로는 <똑바로 살아라>와 <지붕 뚫고 하이킥>에 가장 애착이 간다. 방과 후에 학원을 마치고, 퇴근 후의 노곤한 몸을 뉘이고 마치 습관처럼, 일종의 의식처럼 난 김병욱이 만든 세상을 보고 자랐다. 그의 30분짜리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유독 많았던 내게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사실 좀 웃기지만 고맙다는 을 건네고 싶다.

김병욱의 최신작 tvn의 감자별

시트콤 <감자별>

최근엔 김병욱 감독의 기질이 점점 더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로 향하고 있음을 느낀다. tvn에서 방영했던 <감자별>은 빈부격차와 시들어버린 청춘의 열정과 꿈의 소멸 등을 시큰둥한 시선으로 훑고 있다. 부자는 손쉽게 돈을 벌고, 정작 그 부자를 먹여 살리는 가난한 직원의 가족들은 재개발의 역풍에 휩쓸려 거지처럼 남의 집 차고를 전전한다. 어느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설정이라기보다는 극단의 부조리를 통해 블랙코미디를 유도한다. 사실 김병욱 감독의 어두운 삶의 기조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도 엿본 바 있다. 각종 유행어와 재기 넘치는 이야기들에 가려졌지만, 이 작품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시골 처녀와 방세에 시달리는 지방 대학 출신의 청년들이 가진 문제들이 빈부격차와 함께 드러나 있었다. 이때 성공한 의사 지훈이라는 캐릭터는 식모살이하는 세경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충격적인 엔딩을 선보이는데, 그때 세경은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했고 감독은 그대로 작품을 종결시켰다. 세경이 가정부를 그만두고 이민길에 오르기 전 그들이 유일하게 동급으로 취급될 수 있는 시간에 이르자 시간을 죽여버린 것이다.
<감자별> 설정 역시 지구가 감자별이라 명한 소행성과 충돌하여 멸망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시작된다는 점 자체가 그런 우울한 기조를 위한 일종의 제시처럼 느껴진다. 일종의 어둡고 우울한 기조가 시트콤이라는 어떻게든 웃겨야 하는 장르와 만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뒷맛이 씁쓸한 웃음이랄까. 일일 시트콤이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되는 선들 앞에서 유유자적한 스텝으로 극을 진행시킨다. 사실 방영 초기에는 그 어두움이 불편했다. 굳이 드라마까지 와서 현실의 산적한 문제들을 마주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난 그래서 그의 초기작들을 더 사랑하고, 그 속의 인물들이 가진 가벼움을 좋아한다. 별거 아닌 것에 호들갑 떨며 분노하고, 다시 헤헤 웃어버리는 25분의 마법 같은 가벼움에 만족한다.

한 때 논란이 되었던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세경과 지훈의 열린 죽음

트리비얼리즘의 극대화

김병욱표 코미디의 정점은 트리비얼리즘(trivialism, 쇄말주의)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가 삶의 본질에 다다를 수 없다면, 지극히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여 끝까지 물고 늘어짐으로 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는 소재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가령, 감자별의 한 에피소드는 한 사람이 어릴 적부터 길치라는 설정을 통해 극단의 스토리를 밀어붙인다. 다소 말도 안 되게 여겨지는 설정을 통해 똑똑하고 총명한 성격으로 유명한 최송현의 캐릭터를 내비게이션 없이는 한 방향도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평소 그녀에게 풍겨지는 아나운서적인 이미지와 철두철미한 성격까지 모두 뒤집어내어 웃음을 유발한다. 김병욱이 자주 쓰는 작법이다. 결국 그 극단의 사소함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억지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각 회차의 끝에 다다르면 이야기는 어김없이 그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무언가 배우거나, 성장하거나, 세상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 있거나, 대단한 반전을 남기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저 사소한 그 무언가가 해결됐다는 안도감을 가지고 TV를 끄는 것이다. 저들도 저렇게 아등바등 하루를 수습하기 위해 사는구나 하며. 늘 가던 공간과 늘 보던 인물만을 가지고 늘 하던 이야기를 변주하여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의 구조로 만든 후 할 말만 하고 빠지는 아웃복싱 스타일의 이야기 구조다.
우리는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다른 결을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독서가 나를 구원할지도 모르고, 우리가 경험이라 치부하는 것들이 배움이라는 걸 줄지도 모른다. 모두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난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다. 우리가 도망 쳐봤자 일상 어느 한 구석 아니던가. 김병욱이 만든 세상은 지극히 단순하고, 생략이 점철된 미니멀의 세상을 좋아하는 이유다. 아마 앞으로도 난 김병욱이 만든 세상과 동조하며 많은 세월을 버텨나갈 것이다.

영화 잉투기

영화 잉투기 (INGtoogi: The Battle of Surpluses, 2013)

김병욱 PD의 시트콤과 유사한 기조를 가진 영화라면 <잉투기>가 떠오른다. 잉투기가 그리는 세상을 조금 적어보자면, 이 영화 속 어른들은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상 인종들이다. 잉여들이라 불리는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개싸움에 열중이다. 한 커뮤니티 안의 세상에서 서로를 욕하며 스스로의 지위를 찾아가는 애들. 격투기 동호회 사이트에서 ‘칡콩팥’이라는 아이디로 유명한 태식은 커뮤니티 라이벌이었던 ‘젖존슨’으로부터 대낮에 기습적으로 얻어터진 뒤 그걸 담은 동영상이 네티즌들에게 회자되는 공개 망신을 당한다. 복수를 다짐한 태식은 그날부터 복수를 맹세한다. 할 거 없고, 보잘것없는 젊음에게 할 게 생긴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사소함에 모든 포커스를 집중시킨다. 보는 관객도 지치고, 연기하는 젊음들 역시 스스로 자괴한다. 어머니와의 이별을 다짐한 태식은 모든 걸 버리고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칼을 간다. 그 철부지 아들을 바라보던 엄마는 홀로 이민을 갈 거라고 통보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다른 것 쳐다보지 않고, 세상을 원망하는 시선도 없다. 그저 닫힌 그들 안에서 마치 시야가 절단된 삼류 복서처럼 힘없는 스트레이트를 날릴 뿐이다.
이 영화가 집중하려는 비루한 서울의 단면들, 어쩌면 그것은 김병욱의 시트콤이 포착한 세대의 공기와 유사한 속도와 양을 가지고 있다. 지극히 가볍고 덜한, 귀찮고 협소한 세상에서 자위하는 잉투기의 젊은이들은 김병욱이 만든 세상과 유사하다. 영화 잉투기는 잉여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을 위로하거나, 그들에게 남아있는 희망을 위한 송가가 아니다. 지극히 어둡고 좀 더 나아가 오버하면 묵시록적인 분위기마저 풍기는 패배 담이다.
보통은 쇄말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는 약자에 대한 연민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잉투기와 고통에는 유머만 있을 뿐, 그 어떤 희망과 나아갈 다른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계속되는 자아비판과 소재에 매몰되는 인물의 약소함은 더더욱 궁지에 몰린다. 영화 잉투기의 마지막, 세 젊음은 어두운 고가다리 아래에 모인다. 이제 어디로 가지? 다시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는 그 어두움이 서로의 얼굴에 드리운다. 세경과 지훈이 멈춰버린 시간에 드리운 죽음처럼 암담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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