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Jul 07. 2020

간혹 버닝이 떠오른다

영화 <버닝>

 작가 지망생인 종수(유아인)는 낮에는 택배 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쓴다. 싱크대 옆에 변기가 달린 허름한 방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노트북을 열고 이야기를 만들어 낼 공간이면 족하다. 종수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다. 어려서부터 집은 늘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성마른 기질에 화를 참지 못해 일을 망치는 아버지. 그런 남편을 피해 일찍이 집을 나간 엄마. 때 이른 결혼으로 종수의 인생에서 사라진 누나. 종수는 다 떨치고 서울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가까스로 대학은 졸업했지만, 학자금 대출이 잔뜩 밀려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른다. 종수에게 세상은 미스터리 그 자체다.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잔뜩 던져놓고는 외면하는 의문투성이다. 그런 마음을 소설로 적으려 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거칠게 쌓아 올린 콘크리트로 매워진 잿빛 도시는 종수가 내디딘 시선 아래 펼쳐진다. 달동네 어두침침한 방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유아인의 얼굴이 화면 가득 차오른다.


 유아인은 종수 역을 맡아 난해함을 품고 휘적거린다. 그는 어떤 시기를 잃어버린,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경계를 넘은 연기에 능하다. 그의 텅 빈 표정과 묘한 천진함은 누군가의 고요한 내면을 훔쳐보는 기분을 준다. 여름밤 안개처럼 검고 푸르스름한 기운이 얼굴 구석구석 스며있다.


 종수는 느닷없이 제 앞에 나타난 고향 친구 해미(전종서)와 가까워진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는 매한가지인, 가족과 떨어져 사는 두 사람은 비슷한 듯 달라 보인다. 종수는 해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해미는 종수가 어릴 적 우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줬다고 말하지만, 종수는 우물의 존재조차 아리송하다. 어릴 적 두 사람이 나눈 대화라곤 종수가 해미에게 기습적으로 던진 ‘넌 너무 못생겼어’라는 말뿐이다. 해미에겐 상처로 남은 기억이지만, 망각하길 주저하지 않는 종수는 그녀의 입술에 온 정신이 팔려있다.


 영화의 마지막 꼭짓점은 벤(스티븐 연)이다. 여행을 다녀온 해미와 함께 나타난 벤은 ‘개츠비’처럼 부유하고 마찬가지로 의심스럽다. 거대한 집에서 사람들과 파티를 하고, 모호한 말로 해미의 관심을 독차지한다. 종수는 늘 벤과 붙어있는 해미를 보는 게 고통스럽다. 종수는 벤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다. 열등감 때문인지 해미를 벤에게서 떼어내지 못한다. 두 사람 앞에 불쑥 나타난 벤은 극을 이끌어가는 미스터리의 핵심이다. 종수는 해미의 실종과 함께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낡은 트럭을 끌고 그의 뒤를 밟는 종수는 점점 더 까닭 모를 혼란에 빠져든다.


 <버닝>엔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저물어 가는 여름밤, 대남방송이 다 들리는 파주의 한 외진 마을에서 해미는 춤을 춘다. 다 낡은 축사 옆에서 손을 휘저으며 생경한 몸짓을 한다. 근처에 세워둔 포르셰에선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가 울리고 그녀의 춤은 점차 고조한다. 그녀를 지켜보는 정체 모를 남자 벤은 어쩐지 슬퍼 보이는 미소를 띤다. 또 다른 장면, 용산 다가구 주택가의 허름한 방에서 종수는 해미와 섹스를 한다. 그때 희미한 빛이 침대 맡에 드리운다. 고개를 든 종수는 방을 관통한 그 빛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마치 무언가 심오한 뜻이 있다는 듯이. <버닝>은 의문이 하나씩 드러나다 점차 들불처럼 번지는 영화다. 이창동은 매번 해독 불가한 이미지를 안겼지만, 버닝은 그 정도가 심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려고 하니 영화를 보는 내내 바둥거린다. 실체가 잡히지 않으니 자꾸만 뒤척인다. <버닝>은 말한 것보다 하지 않은 게 더 중요해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게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을 서술한다. 영화는 언어가 미처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다다르고, 어떤 결핍을 남긴 채 스크린 밖으로 사라진다.


 작가가 되고 싶은 종수는 윌리엄 포크너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종수는 포크너의 소설에서 자신과 동류의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포크너의 소설 ‘Barn Burning’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이 작품은 신흥 귀족에 대항하기 위해 헛간 방화에 나선 ‘레드넥’들을 다룬 이야기다. 소설과 달리 종수는 저항이라고 할 만한 무엇도 할 수 없는 처지다. 항거는커녕 본인의 거처를 특정할 수 없는 약자다. 그녀라는 부재를 품은 종수는 창밖으로 남산이 보이는 방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종수는 처절한 몸짓으로 뭔가를 갈구하는 해미를 떠올릴까. 소설에선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조소를 떨쳐내고 끝내 외롭지 않았으면 싶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