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빙 <셰임>
세련된 도시의 밤거리를 걷다 보면 오만가지 생각이 겹쳐온다. 오늘 한 행동을 후회하고, 순간 욱했던 감정의 찌꺼기를 지우기 위해 걷고 또 걷는다. 이 시대는 다시 말해 억제하는 시대라 칭한다. 소모적인 감정과 헛된 노출이 스스로를 잡아먹는 시대다. 그래서 난 밤에 산책을 하며 모두 털어내기 위해 발걸음을 바삐 움직인다. 그저 잠이 들기까지 숨기지 못한 불안이 덮쳐오는 것을 무력하게나마 받아들일 뿐이다.
영화 <셰임>은 어둑한 도시의 발걸음과 그 속에 병들어가는 미니멀리즘의 희생양이 대치하는 영화다. 설치미술의 대가이자 행위예술가인 스티브 맥퀸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셰임>은 뉴욕의 화려한 여피족 남성인 브랜든의 일상을 뒤쫓는다. 겉으론 화려해 보이는 브랜든이지만, 그는 섹스 중독에 관계 기피자다. 어떤 문제로 인해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이 중독 증세를 스스로 치욕스러워한다는 것이며,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정서적인 핵심이다. 감정 없는 섹스 후의 브랜든의 표정은 포스터로 인쇄됐다. 그는 그리운 그녀의 품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다. 그저 스스로 삭혀야 마땅하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치욕감이 들 때면 아이팟을 귀에 꼽고, 갈등 속의 맨해튼을 달리고 또 달린다.
그는 다른 이(가족, 동료) 관계를 의탁하지 않는다. 유능한 직장인으로 경제적인 문제도 없다. 그래서 그는 싱글로서 스스로 제어하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다. 브랜든은 철저하게 자신의 결함을 도시의 세련된 외관 안에 감춰둔다. 벽장을 가득 채운 도색잡지와 노트북 하드디스크 안의 포르노는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하철 이름 모를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눈빛에 흐리멍덩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하지만 사정 후의 공허함은 어쩔 것인가. 쾌락 후의 늘어져버린 성기는 어떠한가. 그저 혼자만의 아파트에서 타인이라는 단어를 지운 체 살아간다.
수평 트래킹으로 촬영된 브랜든의 조깅 장면은 두고두고 생각날 장면이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이팟을 귀에 꼽고 밤거리를 부지런히 달리는 브랜든의 얼굴은 무표정이지만, 그의 뒤로 비치는 도시는 여전히 갈등 속의 신음을 들려준다. 지하철에서 브랜든은 낯선 여자를 보며 또다시 감출 수 없는 욕정을 느낀다. 그녀를 쳐다보는 브랜든의 눈에서는 묘한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그 눈빛을 받아 든 여자는 사타구니에 손을 가져다 대며 브랜든의 욕정을 탐닉한다. 지하철이 멈추고 그녀의 눈빛을 따라 플랫폼에 내린 브랜든은 군중들 속에서 소멸된 그녀를 찾지 못한다. <셰임>은 몇 마디 없이도 외로운 도시의 질감을 그려낸다. 자기 억제와 성욕의 분출을 오고 가는 마이클 파스빈더의 공허한 눈빛은 오랜 시간 동안 기억될 것이다. 난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노트북을 덮고 한 친구를 떠올렸다. 지금은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되어버린 한때 꽤 떠들썩하게 굴었던 사람이었다.
내 회사 동료인 그는 외관상 완벽한 사람이다. 좋은 직장과 준수한 외모를 가졌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파트까지 소유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의 사생활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가 곤경에 처했다는 건 단톡방에서 알았다. 걱정을 가장한 비난 어린 메시지였다. 다들 답이 없었지만, 퍼다 나르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문란한 사생활이 외부에 유출되고, 사내 게시판에 여담처럼 퍼지면서 한 인터넷 뉴스 매체가 기사로 썼다. 주위를 살펴야만 화면에 띄울 수 있는 사진들이 널리 퍼졌다. 그가 흔들리는 꼴은 매 점심, 커피 시간을 장악했다. 다들 그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이면에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 칭하는 시기와 시샘과 비슷한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은 신데렐라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그 신데렐라가 추락하면 눈을 떼지 못한다. 낙차가 클수록 짜릿한 법이다. 그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럴 만한 타격 이상을 받았다. 그의 깔끔하고 나무랄 데 외모는 추한 사생활을 자극적으로 보이게끔 했다. 아니 주인도 없는 집에서 그런 짓을 했다고, 사무실 안에서도 그랬다며. 난 뭐가 사실인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읽었다.
난 평소 그에게 호감을 느꼈기에 작년 이맘때쯤 한 번 그의 사무실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세련되기 이를 데 없는 잘 갖춰진 공간을 쓱 둘러보다가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대화는 겉돌았다. 아무리 번져가는 대화를 오므리려고 해도 교감할 수도 없었다. 난 그가 날 달가워 않는다고 느꼈다. 의례적인 말로 일관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이 경험은 그의 불행을 가책 없이 비난하는데 도움이 됐다.
불과 며칠 전 나는 그를 만났다. 사무실 동료 몇 사람과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상태였지만, 응해주는 건 나를 비롯해 몇몇 동료뿐이었다. 그가 평소 누렸던 사내에서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난 그와 친하지 않았지만, 그의 입으로 사건의 실상을 듣고 싶어 자리에 합석했다. 취한 그가 털어놓는 속사정을 딱 테이블 크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지켜봤다. 그는 숨기고 싶은 사생활을 가족에게 들켜 괴로워했고, 그 일과 관련해 송사에 휘말려 고생을 하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느닷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그와 평소 붙어 다녔던 또 다른 동료는 내게 그가 전혀 그런 사람일 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그리곤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된 건 자업자득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주위 사람들에게도 내 처진 상태였다. 그는 늘 호감을 샀던 자신이 왜 동정을 받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흠결 없어 보이는 인간이 가진 숙명에 관해 그는 무지했다. 나는 술을 계속 따라주며 집에 가야 할 시간을 살폈다. 막상 타인의 불행을 코앞에서 목도하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과녁을 빗나간 위로를 계속 날리는 게 스스로 우습게 느껴졌다. 그는 내가 가고 싶다는 걸 눈치챘는지 자신도 급히 일어서려고 했다.
내가 알기로 한나 아렌트는 악을 두 가지로 정의했다. 먼저 중세 기독교에서 사탄이라 칭했던 악마가 있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흉측한 괴물은 우리가 익히 하는 악마와 다를 게 없다. 영화와 책에서도 이런 악의 이미지는 장르물을 만드는데 좋은 구실이 됐다. 그런 악은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해서 오락으로 소비할 수 있다. 징그럽고 기괴한 모습을 한 놈들을 때려죽이는 일은 통쾌함을 자아낸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와는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 악도 기술했다. 그 유명한 평범한 악. 아렌트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런 악을 현대의 악이라 말하기도 했다. 과거 지명수배자 벽보에 용의자의 생김새를 범죄형이라는 말로 표기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우린 악을 중세 종교가 칭했던 것처럼 선험적 존재로 해석하길 즐긴다. 하지만 아렌트가 주목한 악은 잠시 방심하면 쉽게 치고 들어오는 일상 속의 저변이다. 우린 밥벌이를 핑계로 복종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고, 스스럼없이 벌어지는 악행에 동참한다. 잠시 방심해서 까딱하다가는 휘말려 들어간다. 나는 잘 몰랐어, 라는 말로 당위를 찾지만, 그런 합리화의 반복은 더 큰 악에 가담하는 문턱을 낮춘다.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도 칸트주의자였던 걸 생각해보면, 그 역시 도덕적 정언명령에 따라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본인을 악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스스로 변명하기를, 자신은 그런 부담스러운 직무를 맡게 되어 고통스러웠다고 억울해한다. 이처럼 일상 속에 악은 자기변명이 용이하다. 상황 탓, 조건 탓, 사람 탓에 익숙해지면 죄책감은 비껴간다.
서구 도덕 철학엔 계몽주의적 전통이 팽배하다. 인간은 도덕적 주체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무지의 무구함을 주장하는 이들은 도덕성을 쉬이 유리한다. 정말 무지엔 악의가 없는 걸까. 아돌프 아이히만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학살 당사자가 되길 꺼렸다. 그래서 그는 법정에서 본인이 믿는 도덕론과 다르다는 이유로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아렌트는 양심이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을 꺼내 든다. 악행을 대할 때 인간을 주춤거리게 하는 건 이성이 아닌 인간이 가진 도덕성에 있다는 말이다. 아이히만이 말한 도덕론은 자신의 선택이 부른 여파를 예상하지 못할 때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의도적으로 축소했고, 반유대주의자로서 살육의 행태를 외면하고 방기 했다고 해석했다. 이 유명한 일화를 다시 꺼내 든 이유는 요즘 벌어지는 악행이 과거와는 좀 다르게 교묘해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는 선악의 경계가 흐릿해서 조금만 방심하면 양심적 행위에도 먼지가 낀다. 가령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는 여성을 향한 순정으로 해석하던 속담이 요즘엔 스토킹으로 여겨질 수 있다. 젠더 이슈를 비롯한 사회 감수성은 미묘하고 복잡해서 상황마다 생각을 달리해야 대처할 수 있다. 편을 가른 채 무슨 말만 하면 정파 논리로 해석하는 정치권의 행태는 억지 논리를 양산한다. 아이히만은 나치즘이라는 잔혹한 악 속에 기거했기에 눈에 띄지만, 우린 잘못과 악이 혼재한 상황에서 근무한다. 악을 불변하는 특정 이미지로 고착하는 순간 또다시 속아 넘어갈 위험에 처한다. 결국 흘러가듯 사무실을 부유하는 악을 구분해내려면 매 순간 들여다보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피로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가 SNS에 올린 변명조의 글을 읽었다. 사안마다 진심 어린 사과와 납득시키기 위한 해명이 가득했지만, 그의 대규모 팔로워들이 보낸 반응은 냉담했다. 어떤 반응도 어떤 위로도 없었다. 그는 금세 잊혔다. 회사를 퇴사한 후 그의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다들 그를 어떻게들 기억하려나. 멀끔했지만 속은 비릿했던 무뢰한? 가식을 뒤집어쓴 악한? 위선적인 악당? 항상 능동적인 자세로 일하던 사람이니 어디서든 일은 잘할 거라는 말도 들렸다. 하긴, 아이히만 역시 훌륭한 가장으로서 아이들을 사랑하고, 주변에서는 선량한 이웃으로 알려졌다. 나는 내 일도 아니면서 사라진 그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를 향한 비난의 여론에 참여하고, 괴로워하는 그의 앞에서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악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앞에서 태연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던 게 마음에 쓰였다. 카톡방에 누군가 적은 올린 메시지가 가끔 생각난다. "여러분 크게 확대해서 보지 마세요. 진짜 역겨워요."
최근 한 모임에서 악과 관련된 책으로 모임을 했다. 하지만 의도대로 우리가 평소가 악에 동참하고 가담하는 것에 관해 얘기하지 못했다. 악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제 잘못을 복기하는 자체로 불편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정작 얘기해보자고 나섰던 나 역시 몸을 사리고 변명하는 데 더 힘을 쏟았다. 누군가의 아픔을 상상한다, 는 말이 입속을 맴돌다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