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작아질 때

by 박민진

라코스테 피케티가 작아졌어요. 몸이 불어났으니 작아진 건 아니고 몸이 커진 거죠. 몸이 커진 덴 이유가 두 가지 있어요. 운동량이 늘었고 그만큼 많이 먹은 탓이죠. 문제는 제가 라코스테 피케셔츠를 유독 좋아해서 같은 치수로 열 장 가까이 샀다는 사실이에요.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비싼 옷들을 보니 마음이 아프네요. 거울 속에서 몸에 꽉 낀 셔츠를 입고 있는 제가 너무 흉해서 더는 버틸 수가 없네요. 요즘 가뜩이나 여유롭게 입는 게 트렌드라서 다 버려야 할 판이에요. 이제 더는 살이 빠질 일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제가 우습네요.


어려서부터 몸에 붙는 옷을 좋아했어요. 애초에 내가 살이 찌리라는 가정을 하지 않았어요. 관리엔 자신이 있었고, 늘 날렵한 치수를 유지할 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서 살이 점점 붙더라고요. 처음엔 그저 근 비대(Hypertrophy)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봐도 살은 살이더라고요. 누가 그러던데 몸을 흔들 때 흔들리면 다 지방이래요. 요즘 복부며 허벅지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어요. 다시 살을 뺄 생각도 해봤는데 이제 자신이 없어요. 먹는 걸 포기하면서 운동을 하기엔 내 하루가 그렇게 녹록지 않아요.


라코스테 브랜드를 참 좋아해요. 제가 입어본 피케셔츠 중에 가장 품질이 좋았거든요. 제가 나름 모든 게 잘 풀릴 때 함께했고, 대책 없이 무너질 때도 입고 있었어요. 아쉬움이 컸지만, 생각 끝에 제가 가진 피케셔츠들을 당근 마켓에 중고로 올렸어요. 헐값이지만 그래도 치킨값은 나올 테니 다 없애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마치 수순처럼 한 치수 더 큰 라코스테 피케를 사들이기 시작했어요. 십 년 가까이 입으면서 정도 들어서 그런지 다른 브랜드에는 눈도 가질 않아요.


내가 하도 피케셔츠를 입어대니 가끔 왜 하필 라코스테냐고 질문을 받아요. 앞서 말했다시피 폴로, 타미부터 유니클로, 지오다노, 후아유 같은 비교적 중저가인 브랜드도 입어본 적이 있지만, 저와 인연이 없었어요. 인연이 없다는 게 기억에 남을만한 좋은 기운이 없었던 거죠. 처음 라코스테 셔츠를 입었을 때 기억에 남는 연애를 했어요. 생애 첫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입었던 것도 라코스테였고, 그런 좋은 경험을 할 때마다 의식처럼 같은 치수 라코스테를 사들였어요. 그렇게 인연이 쌓이니 질리기는커녕 입을수록 기분이 좋아졌어요. 옷과 궁합이 맞는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또렷한 색감에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을 잊을 수 없었어요.

그리고 그해 여름, 유럽에 체류하는 기간에 현지에서 여자 친구를 사귀었어요. 그때도 라코스테 티를 입고 있었는데 이상한 용기가 나서 버스에 있던 여인에게 말을 걸었죠.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묘한 분위기가 느꼈고, 며칠 후에 수제 맥줏집에서 새벽까지 대화를 나눴어요. 아마 그 시점부터 현재까지 라코스테는 내게 행운의 상징이자, 고비마다 입는 단단한 유니폼이 된 것 같아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에 입은 라코스테 셔츠는 작아졌고, 이제 새로운 셔츠를 입고 다녀요. 더 선명한 색감의 초록색 악어는 제 가슴에서 잘 자라고 있어요. 갑작스러운 이별이 제게 입힌 타격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이죠. 여름은 짙어지는데 마음이 곪아 새로운 기분을 내고 싶었거든요. 낯선 도시에서 정을 붙이려 애를 써도 당신이 그리워서 도통 마음을 둘 수 없네요. 그러고 보면 라코스테를 하도 자주 입다 보니 기쁜 일 외에 슬프고 노여울 때에도 라코스테의 악어가 나타나요. 연인과의 헤어짐, 직장에서의 날벼락, 혼자 방에서 청승을 떨 때도 이제 악어가 스멀스멀 기어 온다니까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며 사들였는데 이제 옷장이 비좁은지 어느 일에도 마다하지 않고 끼어드네요. 옷이 작아져서 더는 입기 어려워진 것처럼, 악어들도 더는 희희낙락 웃고 있지만은 않을 생각인가 봐요.


진행하던 독서 모임은 유지했어요. 긴 시간 몰두했던 새 책 집필도 다시 시작하려고요.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이겠죠. 하나뿐인 사람과 멀어진다는 건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에요. 어디에 말도 못 하고 앓는 소리만 늘어놓게 되죠. 당신이 제게 보냈던 미미한 신호들을 다 무시했던 걸 많이 후회했어요. 내 문제도 해결하기 벅차니 너그러운 당신이 다 이해해주리라 믿고 함부로 대했어요. 늦었지만 사과하고 싶네요. 제가 모른 척했던 전조들이 저를 짓누르고 있어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뭔가를 짚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다 지나간 후 곱씹을 때 느껴지는 통각 때문에 입 속이 얼얼해요.


어떤 관계에나 약자는 있기 마련이에요. 당신에게 매달리는 저는 처분을 기다리는 죄수가 된 심정이었어요.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고 잠들기 전까지 얘기를 나누는 자정의 삼십 분이 사라지니 하루의 끝이 버겁네요. 매일 밤 뒤척이는 시간이 낭비로 느껴져요. 회의에 빠졌다고 다시 증오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잘해보자고 생각하면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어요. 저는 머리맡 어둠을 뜬눈으로 지켜보면서 창밖에 비치는 가로등과 섞인 어둠을 응시해요. 기괴한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날 때까지 거의 주문을 외는 심정으로 잠을 청하곤 해요. 그리움만 계속 쌓이고 있어요.


며칠 전에 뭐에 홀린 것처럼 라코스테 매장으로 향했어요. 그리고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처럼 옷을 대량으로 사들였죠. 전 불안함과 초조함을 독서와 운동으로 푸는 건전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악어를 봐야 직성이 풀리나 봐요. 요즘엔 침대에서 빛을 옅게 하고 책을 펼쳐도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해요. 문장이 머리를 스쳐 허공으로 흩어지죠. 모든 문구가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느껴지니 읽던 책을 집어던지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어요. 글에는 내가 찾고자 하는 위안이 없더라고요. 유려한 미문도 껍데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요즘 제게 유일한 낙은 아직 상표도 뜯지 않은 라코스테 피케를 입고 집을 나서는 짓이에요. 원색 라코스테 피케셔츠를 입고 집 근처 카페로 가서 뭐라도 써요. 아무도 읽지 않는 지질한 연애담을 쓰며 저를 다독여요.


어쩌다 보니 지방 발령 소식을 지인들에게 전하지 못했어요. 일하러 가는 건데 무슨 유난을 떠나 싶어서 작별 인사를 못했죠. 제가 유독 남의 입에 오르는 걸 싫어하잖아요.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낯선 동네에 떨어지니 모든 게 낯설어요. 시도 때도 없이 과거를 떠올리며 넋 놓고 있어요. 애틋하지만 이제 내 것이 아닌 것들에 미련을 가져요. 이제 더는 내게 속하지 않는 먼 세계의 소음을 그리워해요. 나를 구석으로 밀어내며 내 존재를 점점 희미하게 만드는 짓이에요. 현실감이 옅어지면서 일에 집중하지 않고 있어요. 더위를 먹은 건지 일시적인 슬럼프인지 잘 모르지만, 짧게 끝났으면 좋겠어요. 창밖 미풍 속에 깃든 쓸쓸한 음영이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싶어요. 결국, 어떻게든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