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있을 이야기지만, 난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갑작스럽게 가정에 위기가 닥쳐와 가족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쭉 가난해온 것과 갑자기 가난해진 것은 다릅니다. 충격의 여파는 오래가고, 장담할 수 없는 시간들이 흘러가죠. 가난해지면 집이 좁아지고, 가구를 버리게 됩니다. 손때 뭍은 물건들이 버려지면 마음이 황폐해집니다. 육신이 추워지고, 늘 목이 마른 기분이 들죠. 가난의 행태는 내가 알기론 다들 비슷합니다. 모두가 아는 실수를 해서 전형적인 방법으로 가난해지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각자 다 다른 건 불행입니다. 모두 제각각의 방식으로 불행에 처합니다. 어디서 말하기도 민망한 얘기들입니다. 다들 그 정도 경험쯤은 가지고 있으니까요.
학교 다닐 땐 수업이 다 끝난 텅 빈 교실을 좋아했습니다. 노을을 머금은 교실 풍경은 정말 아늑하잖아요. 전 가끔 남아서 다이어리를 적거나 편지를 썼습니다. 늘 사 분단 끄트머리에 앉아있었는데 그때쯤엔 햇빛이 교실 끄트머리까지 넘보곤 했습니다. 복도에서 안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그 빛을 보면 그렇게 아늑할 수 없었습니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붉게 물든 창과 적막한 교실의 고즈넉함을 꽤 즐겼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이는 시간이랄까요. 창문을 내다보면 여태 집에도 안 가고 공을 차는 놈들이 있었고, 전 걔들이 다 집에 갈 때까지만 교실에 남아있었습니다. 전 유독 축구를 싫어했는데, 놈들의 열띤 승리욕이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여자애들이랑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즐거웠지, 아직 유인원 티를 벗지 못한 시커먼 놈들은 질색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외톨이었다는 말이에요.
당시 갑작스러운 이사로 혼자만 딴 동네에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래서 방과 후에 혼자만 버스를 타고 다니는 걸 들키기 싫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쪽팔렸는지 유령처럼 혼자 다녔습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다는 걸 누구도 모르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애들이 다 사라지면 교실을 나섰던 겁니다. 학교가 텅 비었을 때 귀신처럼 후문을 통과해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습니다. 물론 계획대로 잘 되진 않아서 종종 불량한 패거리와 딱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걔들이랑 썩은 미소로 허튼 농담을 주고받다가 도망치듯 자리를 뜬 적이 여러 번입니다. 그렇다고 녀석들이 제게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전 철벽을 치면서 인사치레만 하고 도망쳤습니다. 그간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도 멀어졌습니다. 이사 전에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놀던 애들도 내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니 더는 찾지 않았습니다. 그게 섭섭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저를 알아봐 주지 않는 상황에 놓이니 오히려 해방감이 들었습니다. 시답잖은 말로 하루를 빼곡하게 채우는 녀석들과 있으니, 그냥 시립도서관 열람실에 앉아서 신간 소설을 읽는 게 더 즐거웠습니다. 이런 식으로 고립을 자초하는 성격은 어른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침 등굣길이 멀어져서 아침에 일찍 나섰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면 학교까지 15분 정도 걸어야 했는데, 거의 매일 근처 대학병원 일층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학교로 갔습니다. 배가 아프지 않아도 꼭 들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새로 지은 병원이라 화장실도 깨끗하고 커피도 공짜로 먹을 수 있어서 쉬러 갔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이사를 간 집에 제 방이 없었거든요. 하루아침에 혼자일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니 아무도 나를 모르는 병원 화장실이랑 로비가 좋았던 것입니다. 대형병원과 백화점 화장실은 혼자 아파하기 정말 좋은 공간입니다. 윤택하고 조용한 데가 비발디의 곡이 흘러나오니 몸과 정신을 정화시키는 기분입니다. 저는 당시 혼자 생각하고 빈둥거릴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화장실 세 번째 칸에 앉아서 시간이 남으면 가져온 소설도 읽고, 로비로 나가서 어르신들과 텔레비전 아침 뉴스도 봤습니다. 아무도 제가 교복을 입고 거기 앉아서 뭘 하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판기 커피를 연신 뽑아먹고 신간 잡지를 축내도 다 그러려니 했습니다. 환자복을 입고 근심 어린 표정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유자적 노는 제 모습이 그려지나요. 그땐 어떤 위안이 있었습니다. 바보 같이 아픈 그들보다 내가 더 나은 삶처럼 여겨졌거든요. 학교에 가면 제 처지가 열등했는데, 병원 로비에서는 제일 건강하고 활달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짓거리를 하고 다니니 학교 성적은 더 바닥을 쳤지만요. 전 점점 더 학교가 싫어졌습니다. 그럴수록 방과 후에 딴청을 피우는 시간은 늘어만 갔습니다. 그때 몰아서 읽은 책들이 지금 제 삶의 많은 부분을 결정했습니다. 그 당시 제 꿈은 도서관 사서가 되는 것이었는데, 뭘 모르니까 사서가 되면 책들 사이에 숨어서 유유자적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로비에는 우먼센스나 여성동아 같은 잡지가 있었습니다. 자극적인 기사 위주로 읽다가 어느 순간부터 월간미술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모르는 게 대부분이라 재미는 없었는데 그냥 한 꼭지라도 읽으면 미술에 관해 뭔가 알게 되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흡수가 안 되는 글을 붙들고 더디게 읽었는데도 좋았습니다. 특히 잡지에 소개되는 서울의 온갖 전시 소식을 보면서, 나만 모르는 그들의 작당을 부러워했습니다.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 같아서 초조함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 갑자기 월간미술 얘기를 꺼낸 건, 그때가 아마도 제가 미술에 처음으로 관심을 두게 된 시기가 아닌가 싶어서입니다.
그렇게 힘겹게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수업이 다 끝나고 교실에 남아서 뭔가 하는 척하면서 반 친구들이 사라지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날따라 한 아이가 집에도 안 가고 책상에 꼭 붙어 있었습니다. 전 내심 혼자이길 바랐는데 실망스러웠습니다. 녀석도 내가 왜 남는지 의심스럽게 쳐다보면서 성가셔했겠죠. 전 당시엔 학원을 다니지 않았는데 녀석은 두툼한 학원 문제집을 꺼내서 풀기 시작했습니다. 전 멀찍이서 학원 대신 소설책이나 읽는 제 삶이 더 낫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적막히 흐르는 상태로 우리 둘 다 각자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녀석은 그런 정적이 부담스러웠던지 먼저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와우' 풍선껌을 하나 주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해왔죠. 다 뻔한 질문이라 답하기 싫었지만 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체 왜 혼자 교실에 남아서 뭐하냐느니,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하냐느니. 전 급히 말을 돌려버렸고, 대화는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번도 말을 나눠본 적이 없는 친구라 더 어색했습니다. 전 그래도 녀석이 미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화집을 꺼내서 보는 걸 본 적이 있었거든요. 딱 봐도 학원에서 준 것처럼 보였는데 근래에 미술잡지를 보던 저는 그 모습이 되게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매일 범죄 소설만 읽는 저와 달리 뭔가 있어 보였거든요. 제가 모르는 것에 관심을 둔다는 게 부러웠습니다. 미술은 뭔가 고고하고 어려운 것 같은데, 그 무거운 화집을 이스트팩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게 부러웠습니다. 아마도 동경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녀석이 교실에 없을 때 몰래 책상 서랍에서 화집을 꺼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유명한 인상주의 작가들의 화려한 그림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녀석과 한참 대화를 나눴습니다. 요즘 담임이 하는 꼴이 못마땅하다는 말을 꺼내니 자연스레 대화화는 학교에 관한 얘길로 흘렀습니다. 난 어떻게든 녀석을 웃기고 싶었는데, 구미가 당기는 소재가 달리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최근에 재밌게 읽은 책이랑 영화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제야 녀석도 자기가 좋아하는 책 얘기를 하더군요. 전 그때부터 학기 내내 녀석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긴 대화를 나누면서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친구였으니까요. 전 매일 교실에 남았지만, 녀석은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녀석이 들려줬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것뿐이었습니다. 다 읽지도 못한 채 반납할 때가 잦았지만 아마 그때부터 미술을 동경했던 것 같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와는 살짝 거리가 있는 곳에 둥지를 튼 예술가가 부러웠어요. 녀석은 지금 뭘 하며 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일 년간 유럽에서 살 때 여러 도시를 떠돌며 미술관을 참 많이도 다녔습니다. 알 수 없는 갈증이 치솟아서 숙제하듯이 섭렵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이 도시를 떠나면 평생 못 올 수도 있으니 무조건 유명한 미술관을 가야 한다는 심보였습니다. 트램을 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평소 책에서만 보던 작품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온 유럽이 미술관처럼 보였습니다. 옆에서 일행이 지겹지도 않냐고, 언제까지 고루하게 미술관에서 줄 서다가 여행을 마칠 거냐며 뭐라고 해도 쉬지 않고 들렀습니다. 거기서 팸플릿도 꽤 많이 챙겼습니다. 나중에 볼일이 없을 걸 알면서도 그래야 마음이 놓였거든요. 학창 시절부터 쌓였던 미술을 향한 경외와 허영이 폭발한 시기였습니다. 미술을 온전히 즐기기보단 잘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싫지 않았고, 뭔가 더 알아갈수록 으쓱해졌어요.
그런 지적 강박의 발로로 요즘도 현대미술에 관한 대중서를 자주 읽습니다. 가벼운 교양서일지라도 카페에서 각을 잡고 봅니다. 퇴근해서도 되도록 잘 읽히는 미술책을 골라서 미술사를 익히고 있습니다. 과거에 제가 생각했던 미술이란 가난한 작가가 피를 토해내며 하늘에서 떨어진 한 조각의 빛을 그려내는 느낌이었습니다. 세잔이 물결에 스치는 빛에서 인상주의를 그려냈던 것처럼 말이죠. 근데 요즘 현대미술은 일상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미니멀리즘 작가 댄 플래빈이 한 말이 기억에 남네요. "작품 자체와 그 구현은 순간적인 쾌락에 불과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를 적어 서랍에 넣어둔 종이 한 장이다. 그래서 학생의 필통에도 건축물 벽면에도 앤디 워홀의 통조림 수프 형상이 새겨지지 않았던가." 물론 부와 권력이 세계 미술의 패권을 가져갔지만, 살면서 느끼는 심상한 감정이 미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목격하면서 미술과 많이 친근해졌습니다. 내 삶과 꼭 멀지만은 않은 이야기 속에 작가의 작품이 있었거든요.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감정을 지나치지 않고 작품에 녹여낼 때 어떤 위안이 생겼습니다. 생각해보니 방과 후 교실에서 녀석이 했던 말도 비슷한 얘기였어요. 녀석은 미술이 일상에 버무려진 광경을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창밖 노을 가리키면서 거기에 손가락으로 프레임을 만들어서 그게 얼마나 즐거운지 설명하려고 시도했죠. 전 당시에는 멀뚱멀뚱 뭔 소리냐며 쳐다봤지만 요즘도 가끔 녀석이 가지고 다녔던 르누아르 풍 그림을 프린팅 한 필통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게 제 눈에는 미술이 삶과 긴밀하게 연계한 광경이었습니다.
기억은 미화된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파스텔톤으로 희뿌여시고, 우린 앞을 캄캄하게 만든 어둠마저 채도를 높여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게 인간이 가까스로 하루를 부여잡고 버틸 수 있는 비결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친구들과 모여 앉아 얘기할 때도 전 기억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나은 얘기를 하려고 노력할 뿐이었죠. 비록 온전한 진실은 아닐지라도 제가 표현해낸 하루는 실제보다 조금은 더 근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렵사리 내린 결론도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게 삶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엔 답을 찾지 못해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보려고 합니다. 재고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힘이 들거든요. 그래도 고민으로 얻는 안정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색의 시간, 밤의 뒤안길은 캄캄하고 지루하기만 한데 갈팡질팡하다가 아무런 답 없이 빈손으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전 제 감정을 잘 모르고, 지금 느끼는 통증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도 알 수 없습니다. 왜 미련을 갖고 살며 왜 끝까지 매달리는지 열심히 탐구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제 속내를 기술하려면 갈 길이 멀지만 이렇게나마 속상한 마음이 글로 드러나니 한결 나은 기분이 드네요. 베고 누운 머리맡이 편해졌고, 아침에 먹는 시리얼이 더는 뻑뻑하지 않습니다. 가끔은 파스텔톤 필터를 끼운 것처럼 풋풋한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우리 시간도 그렇게 의도한 왜곡을 거쳐 고이 보존될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교실 사 분단에 비친 햇살처럼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서 고스란히 떠오르겠죠. 당신을 작은 갤러리에서 본 순간을 적어볼 생각입니다. 분명히 어디에서도 만질 수 없는 감각이 생겨날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수업이 끝나고 난 뒤에 시작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