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 애착 불안

버닝

by 박민진

오늘 또 라코스테 피케티를 샀습니다. 이제 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한 번 산 이상 질리지도 않고 입는 셔츠라 돈이 아깝진 않지만, 같은 디자인 옷이 색깔별로 걸린 옷장을 보면 심란해집니다. 요즘엔 새 옷을 입을만한 약속도 없는데 태그도 떼지 않은 반듯한 피케티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전 가끔 옷장을 열고 원시 부족의 토템이라도 되는 것처럼 피케티를 만져보며 안도감을 느낍니다. 아마도 그건 앞서 말했다시피 제가 가장 좋았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서 일 겁니다. 희로애락의 순간마다 전 오른쪽 가슴에 악어를 달고 있었습니다. 빳빳한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나서면 모든 게 다 정상 상태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요즘은 초기화 버튼을 누르고 싶나 봅니다. 뭔가 기분전환을 하면서 다른 얼굴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기분을 내려고 없는 약속을 잡고, 안 나거든 모임 자리에도 얼굴을 비추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우연히 이십 대 초반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젊은 나이에 돈이 얼마나 많은지 비싼 술을 잔뜩 시키고 놀았습니다. 뭔가 잘못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 즈음 날 모임에 초대한 친구와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이런저런 사회 현안에 대한 말을 꺼냈습니다. 아마도 저랑 어떤 공통분모가 있는지 모르니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시도로 보였습니다.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시종일관 열변을 토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며 듣던 저는 점차 참을성이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잘 놀다가 끝내 심사가 뒤틀렸습니다. 거리낌 없이 사회 현안에 관해 일갈하듯 말하는 게 영 못마땅했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세상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꼬웠습니다. 그가 말하는 '올바름'이라는 것이 저에게는 지나치게 순진하고 막연하게 낙관적으로 들렸습니다. 뭔가 한마디 통박을 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자리를 피해 화장실로 갔습니다. 취기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 후회할 할 것 같았거든요. 각자 다 사정이 있는 거니까 옹졸하게 굴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화장실 거울을 보니 제 피케셔츠에 김칫국물이 묻어 있는 게 보였습니다. 아무리 물로 문질러도 자국이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을 켜보니 그 친구가 제 허락도 없이 저와 찍은 사진을 자신의 계정에 올린 게 보였습니다. 전 화가 치밀고 피곤해져서 급히 자리를 떴습니다. 속에 뭔가 얹힌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았습니다.


거리로 나와 택시를 타고 문득 낯선 친구들과 왜 술을 먹게 됐는지, 왜 눈치 없이 그런 자리에 꼈는지 생각했습니다. 삶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종종 벌어지잖아요. 대개는 영문을 모르기 때문에 어안만 벙벙해지는 그런 일들이 생길 때 저는 제가 약해졌다고 느낍니다. 문득 당신과 저도 어떻게 만났는지 신기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시엔 그걸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감격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우연에 불과한 걸 제가 확대에서 인위적으로 갖다 붙였습니다. 사실 제가 경험한 모든 연애가 확대해석으로 시작됐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당신을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갔다가 만났고, 당신은 어울리지 못하는 저를 챙겨주면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당신과 사귀면서 제가 지켜본 당신 주위의 사람들은 당신이 아니었다면 절대 만날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배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겹치는 게 없는 이력을 지닌 사람들을 당신 덕분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쩌다 당신이라는 세계를 접하게 됐는지 따져보면 볼수록 우연이 겹쳐서 만든 당신이라는 세계가 제겐 선물과도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삶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우연을 이해하고자 수많은 글을 썼지만, 공들여 적어도 온전한 진실이 담기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난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제게 엄연한 진실 그 자체입니다.


전 글을 쓸 때 현실과 허구를 적절히 섞어가면서 씁니다. 그래서 제 글 속에는 마치 평행우주와 같은 또 다른 제 모습이 담기기도 합니다. 실제의 저와는 다른, 꾸며낸 것이라 하더라도 저라는 사람의 지문은 여전히 글 속에 묻어 있습니다. 그렇게 허구라는 틀 속에 숨어 글을 쓰면 안전한 해방감에 휩싸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눈치 보지 않고 글로 쓰고, 성질을 부려도 누군가를 지칭하지 않기에 자족적인 분노에 불과합니다. 글 속에 사는 저는 일급 변호사처럼 유창하게 변론을 펴고, 털끝만큼도 오류가 없는 논리 싸움으로 독자를 납득시킬 수 있습니다. 글 속에서라면 팩트를 체크하는 손석희처럼 명철하고, 누구에게나 호감이 사는 유재석처럼 사람 좋은 말을 곧잘 합니다. 무엇보다 글을 쓸 땐 저라는 사람을 좀 더 나아 보이게 포장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게 저라는 사람을 더 나은 사람처럼 느껴지도록 하기에 어찌 됐든 매일 쓰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전 가끔 영화 <버닝>을 반복해서 봅니다. 하도 여러 번 봐서 대사까지 다 외워버렸죠. 요즘 유독 생각하는 장면은 곱창전골 식당에서 종수가 벤과 혜미랑 술을 진탕 마시는 장면입니다. 그때 종수가 벤에게 혹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봐요. 벤이 천연덕스럽게 실실 웃으면서 아마 얘기해도 모를 거라고, 간단히 말하면 그냥 노는 거라고 대답합니다. 머쓱한 구석도 없이 요즘은 노는 것과 일하는 게 구분이 없어졌다고 말해요. 그 말에 대해 종수가 곰곰이 생각하는데, 그때 벤이 작가 지망생인 종수한테 혹시 어떤 작가를 좋아하냐고 물어봅니다. 종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윌리엄 포크너라고 대답해요. 포크너의 소설을 읽으면 내 얘기 같다 싶을 때가 있다고 덧붙여 말합니다. 근데 거기다 대고 벤이 또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나요. 벤은 종수에게 자기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합니다. 자기 얘기를 소설로 쓰면 좋을 거라면서. 이 말이 종수에겐 어떻게 들렸을지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종수의 떨떠름한 표정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알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던 저도 뭔가 께름칙한 걸 느꼈는데 그게 어떤 건지 말로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열등감인지 허탈감인지 하다못해 그냥 수치심에 불과한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종수에게 벤의 말은 모욕으로 들렸을 거라는 점입니다. 종수가 궁핍한 환경에서도 일용직 알바까지 하면서 붙들고 있는 소설가라는 직함을 그가 자기 얘기나 쓰라면서 가볍게 치부한 것입니다. 마치 제 삶이 포크너의 소설 못지않게 의미가 있으니 들어보라는 식이잖아요. 그건 종수에겐 문학이 별거 있냐고, 나처럼 노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말로 들리지 않았을까요. 요즘 종수의 처지가 몰려있어서 더 예민해진 것도 있었을 겁니다. 근데 그 술자리에 껴서 그들의 얘기를 엿듣는 저도 모욕감 비슷한 걸 느꼈습니다. 저와는 다른 세계를 사는 상류층의 계급성을 의식한 탓인 것 같습니다. 나와 다른 세계를 향한 당신을 향한 시샘과 불안도 이 장면에서 떠올랐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혜미가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나은 벤만 바라보고 있으니 저도 종수 못지않게 화가 났습니다. 전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뜨는 종수를 보면서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영화가 다 끝나도 종수는 벤이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의심만 가득하지 진실의 어느 부분에도 가닿지 못하고 벤을 불태웁니다. 이제 종수는 어쩔 수 없이 텅 빈방 안에서 저만의 서사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에서 종수는 혜미를 어디에서 찾았을까요. 종수에게 벤은 이해할 수 없는 요즘 세상의 다름 아닌 이름일 겁니다. 이 세상엔 정체를 알 수 없고 부자인데 어딘지 의심스러운 개츠비들 천지잖아요.


전 누군가가 세상사를 꿰뚫은 것처럼 단언하면 의심부터 품습니다. 쉽사리 세상을 어떤 곳이라고 말하는 순간 빠져나가는 뭔가를 의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 항상 세상을 대할 때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끝을 흐리면서 얘기합니다. 그런 기분이 <버닝>이라는 영화에 담겨있기에 전 이 영화를 계속 볼 수밖에 없습니다. 쉬운 결론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여전히 뭔가 다른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옆구리를 찌르는 손짓을 모른척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여름 저는 당신도 알다시피 완전히 미쳐 있었습니다. 느슨한 상태로 온통 딴 데 정신이 팔린 상태로 어영부영 보냈습니다. 저는 누군가 불쑥 내지르는 말에 요란스레 웃었고, 어둠 속에서 말없이 입 모양만 뚫어지라 보다가 자리를 뜰 때가 많았습니다. 전 누구나 불편해할 말을 하면서 분위기를 흐렸습니다. 주색에 경도된 채 여자 하나에 절절매면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습니다. 사실 혼란스러움을 핑계로 제가 일군 것들을 다 망쳐버린 셈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지금은 잔뜩 뒤엉켰던 속내를 글을 풀면서 어느 정도는 헐렁해진 상태입니다. 허기가 지고 힘이 쭉 빠질 때 쓴 글들이 저를 다독여 줬습니다. 블로그에 달린 댓글 하나 보면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당신은 이제 제 글 속에서 의문을 품은 존재로 형형하게 살아남았습니다. 당신을 의문만 잔뜩 남기고 떠났지만 저는 여전히 답을 구해 쓰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체중이 스무 살 이후로는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수치까지 내려갔습니다. 거울을 보면 얼굴이 뭔가 샤프해 보여서 좋긴 합니다. 어제저녁, 여름이 저물어가는 모습을 구경하러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하니 우리 이별을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미숙했지만 있는 힘껏 당신을 끌어안으려고 싸웠던 것 같습니다. 힘에 부쳤지만 아직도 몸이 얼얼할 만큼 꽉 앉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