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를 보다가

홍상수

by 박민진

며칠 전에 목이랑 등이 뻐근해서 병원에 들렀습니다. 정말 사람 많더군요. 세상에 아픈 사람은 거기 다 모여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들 별 수 없이 골골대며 사는 것 같아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기도 했습니다. 저만 아픈 게 아니라는 위안이랄까요. 병원 로비에서 코스모폴리탄, 지큐 같은 잡지를 읽었습니다. 요즘 패션 동향을 보고, 하나 사서 입어볼 만한 브랜드가 있는지 구경했는데 가격도 가격이지만, 왜들 그렇게 통이 큰 옷을 입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미적으로도 비쩍 마른 몸에 그렇게 큰 치수의 옷을 입는 게 뭔가 부자연스러워서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긴 그러고 보면 당신도 개량한복 같은 옷을 좋아했습니다. 사실 꽤 어울렸는데 짓궂게 놀려대곤 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네가 무슨 패션을 아냐는 얼굴로 되받아쳤죠. 전 신이 나서 택견 흉내를 내면서 놀렸습니다. 전 뭐든 펄럭거리면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당신은 꿋꿋하게 입었습니다. 역시 힙스터 노릇을 하려면 귀를 닫아야 하나 봅니다. 당신은 불편한 옷은 질색해서 제가 사준 꽉 끼는 원피스는 잘 입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좀 서운했는데 당신을 제 취향에 맞추려고 했던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합니다.


점심이라 대기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면서 다리를 꼬고 제가 좋아하는 헬스 관련 잡지를 펼쳤습니다. 헬스장에서는 다들 저처럼 꽉 끼는 옷만 입더군요. 두꺼운 팔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터질 것 같은 셔츠를 입고 건방진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마른 모델이 득세하는 패션 잡지와 달리 피트니스의 세계에서는 어디 하나 울퉁불퉁하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그게 당신과 저를 둘러싼 세계의 차이인 것 같아 이상하게 슬펐습니다. 이렇게 다르니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거든요.


두 세계가 나란히 꽂힌 병원 로비에는 이상한 침묵이 맴돌았습니다. 오직 통증이 사고를 장식해버린 환자들의 표정은 우울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무 말도 없이 텔레비전만 바라봤습니다. 아픈 구석을 해소하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습니다. 지금 이들에게 가장 관심이 없는 걸 물어보면 아마 패션이라고 답할 것 같았습니다. 고통은 일상을 잠식합니다. 저도 모르는 바가 아니라서 몇 분간 낮 시간에 주부들이 자주 보는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녹즙을 갈아서 맛있게 마시고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아나운서가 이상하게 절 놀리는 것 같아서 다시 잡지를 펼쳤습니다. 슬슬 지루해지던 차에 잡지를 몇 장 더 넘겨보니 연예인들의 열애설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눈을 뗄 수 없는 기사였죠. 전 자세를 고쳐 잡고 그들의 사생활을 낱낱이 까발린 기사를 읽었습니다. 누군가의 눈을 피해 사랑을 해야 하는 처지가 안돼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을 넘기니 적절한 시점에 이별을 고하는 요령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남몰래 키운 사랑 이야기를 읽다가 이별을 적절하게 할 수 있는 비법을 읽으니 세상이 온통 연애로만 보였습니다. 제 머릿속에도 그때 당신을 향한 그리움만 있었으니까요. 나 빼고 다 알콩달콩 잘들 사는구나 싶어서 조금 우울하기도 했습니다. 이것도 엄연한 통각이 아닐까 생각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가 마음을 머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마를 문질렀습니다.


기사를 읽으면서 제가 헤어졌던 방법이 소개되는지 살폈습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연애 칼럼니스트라는데 난 문득 그의 연애는 어땠을지 궁금해졌습니다. 그가 쓴 이론대로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요령껏 잘 대처했을까. 대체 어떤 연애를 해왔기에 이런 기사를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겼을까. 모르긴 몰라도 연애를 직접 하기보다는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얘기를 이렇게 냉철하게 적을 순 없을 테니까요. 전 문득 연애 이야기로 원고료를 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연하게 내 연애의 전모를 다 털어놓고 원고료를 번다면 쉽게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전 불현듯 연애칼럼니스트와 술 한잔 걸치면서 내 실패한 연애담을 늘어놓고 싶었습니다. 권위 있는 전문가 앞에서 내 비굴하고 지질한 이별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다 이해받고 싶었습니다. 그가 고심 끝에 제게 실패 원인과 개선 방향을 알려주면 전 더 나은 연애를 할 수 있을까요. 당신과도 헤어지지 않고 잘 만날 수 있었을까요.


당신은 언젠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나를 떠나면 불행해질 거야. 어쩌면 살기 어려울지도 몰라." 어떤 흔들림도 없이 제 두 눈을 똑바로 보며 호언장담하는 당신을 보며 전 웃어 보였죠. 전 지금도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어조로 말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누구도 당신만큼 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고, 딴 데 눈을 돌려봤자 결국 전 당신을 찾게 될 거라는 말이 믿음직스럽게 들렸습니다. 근데 이제는 그 말이 저주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주문을 걸면 당신을 옭아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떠날 수 있다는 가정은 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주술에 걸려서 전 지금 혼자입니다. 왜 우린 만남을 지속할수록 의심과 불안을 떨치지 못했을까요. 잡지만 펼쳐봐도 성공적인 연애 비법이 수두룩한데 왜 그럴 수 없었을까요. 지금으로선 욱신거렸던 감정만 남아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당신이 저를 헌신적으로 돌봐주는 마음을 이용했습니다. 우위에 서서 당신의 애정을 편의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당신은 제 손바닥 안에 있다고 과신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떠나지 못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우린 깨졌습니다. 연애 감정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모든 확신이 한순간에 어그러져요. 저는 남녀관계라는 게 그냥 풍덩 빠지는 거로만 알았나 봅니다. 서서히 변질하고 어느 순간 지쳐 나가떨어진다는 건 잘 몰랐습니다. 아무리 잡지를 읽어도 권태를 극복하는 뾰족한 수는 없었습니다. 전 요령부득하여 당신의 외롭고 굽은 등을 어루만지질 못했습니다. 잡지를 휙 넘기는 것처럼 당신의 마음을 제 편의대로 넘겨버렸습니다. 그에 따른 대가는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 사연이 잡지 속에 실린다면 차마 보기 어려울 정도로 흉측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잡지 말미에 이번 주 개봉 영화 코너를 보니, 몇몇 유명 감독의 신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곧 홍상수 감독의 신작도 나올 예정입니다. 전 홍상수의 모든 작품을 봤고, 그 의미를 곱씹느라 참 긴 시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작품을 온전히 제 세계로 받아들이는 데 공을 들였고,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는 느낌이 좋아서 계속 찾습니다. 누군가의 예술을 제 사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서 글을 쓴 것도 그를 통해서였습니다. 홍상수의 영화는 좀 심심하지만, 마음이 맑아지는 구석이 있어서 좋아합니다. 별다를 게 없는 잔잔한 일상이지만 깨끗한 뭔가를 얻어가는 기분이 든달까요. 의미나 상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으면서도 이야기가 과녁에 꽂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메시지를 주겠다고 극적인 장면을 삽입하거나,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서 인물을 구해내겠다는 위력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편의적으로 현상을 해석하거나 손쉽게 결론짓지 않는다는 게 제겐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치기와 더러운 생각은 하수구로 흘러가고, 컴컴한 극장이 주는 작고 느슨한 감동에 숨통을 틔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