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꽤 바쁘게 지냈습니다. 환경이 바뀌고 늘 앉던 책상도 달라지니 늘 하던 일마저 더뎌지네요. 새로운 동료들을 계속 만나다 보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루가 무척 길다고 느꼈고, 무엇보다 사는 동네가 낯서니 싱숭생숭해서 퇴근해도 기쁘지 않습니다. 새로운 직무에 적응하고, 아침에 다시 커피를 내릴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다 좋습니다. 저를 좋아하는 것 같고, 외롭지 않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주는 통에 기분이 아늑해졌습니다. 기차역에서 주말을 시작하는 게 여전히 버겁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는 게 어쨌든 궤도를 찾기 마련이잖아요. 새로운 습관을 만들고 그걸 지켜나가면서 안정을 찾았습니다. 주말엔 차를 타고 한 시간씩 드라이브도 하고, 텅 빈 아트하우스에서 우중충한 영화를 보기도 했습니다.
당신에겐 죽는소리나 했지만 늘 하던 운동과 글쓰기는 놓지 않았습니다. 그게 제가 버티며 쉴 수 있을 구멍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이런 쓸쓸한 기운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고생에 몸은 날렵해졌고, 지난 몇 년간 걸쳐 본 적 없는 백팩을 메고 프로 작가라도 된 양 살고 있습니다. 턱없는 글이지만 이제 연말이면 책 한 권을 낼 수 있는 원고도 만들습니다. 곧 새로운 책에 대한 얘기도 떠벌릴 수 있을 겁니다. 가장 고민하는 건 책 콘셉트입니다. 전 계속 글을 써왔지만, 중구난방에 견강부회에 가까운 글만 잔뜩이라 책으로 묶기가 애매합니다. 우선, 제목이 가장 큰 고민이에요. 제가 뱉은 빼곡한 문장이 가리키는 바가 뭘까요. 어떤 제목이 독자의 구미를 당길까요. 우선 딴생각 말고 교정 작업에 시간을 쏟아보려고 합니다. 당신 덕이 컸습니다. 책이 나오면 꼭 선물하고 싶습니다. 다음 책을 낼 땐 좀 더 제 책에 떳떳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온라인 글쓰기 모임도 해볼 생각입니다. 의욕적인 분들과 함께 글을 쓸 생각입니다. 글쓰기는 혼자서 하는 행위지만 같이 쓴다는 동류의식 정도는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과 책을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2주에 책 한 권을 읽고 장문의 글을 써야 하는 모임이라서 일정이 빡빡하겠지만, 저같이 시간이 비면 불안해지는 사람을 위한 맞춤 모임인 셈입니다. 그리고 진행하던 주말 독서 모임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제가 커리큘럼을 만들고 책에 관한 발제를 하고 글감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당신도 제가 진행하는 모임이 참 좋다고 했잖아요. 제가 모임을 진행할 땐 표정부터 달라진다고. 독서 모임은 제게 큰 기쁨입니다. 모임에서 읽고 쓴 글이 새 책을 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만난 인연이 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끔 했습니다. 최근에 모임에서 읽은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라 밑줄을 그어가며 필사도 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 매일 열 문장 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리추얼처럼 글을 쓰는 분들과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낯선 도시에서도 문학과 글쓰기를 함께할 수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게 기쁘네요.
쭉 적다 보니 전 뭐든 더하기에만 급급한 사람이라는 걸 느낍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지 전 한시도 스케줄러가 비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작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 <불멸>에서 자아의 단일성을 가꾸는 방법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쿤데라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날이 갈수록 서로 닮아가는 세상에서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자신의 유일성을 획득하는 게 가능한지 묻습니다. 소설의 화자인 '로라'는 자신을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뭔가를 갖다 붙이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녀는 매일 새롭게 접하고 경험하는 것이 자신을 증명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회에 드러난 자신의 정체성을 발달시키면서 나를 좀 더 가시적으로 명확해지려고 노력합니다. 이건 정확히 제가 택한 방식과 일치합니다. 저 역시 끝도 없이 절 바깥으로 내밀면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쿤데라는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가진 위험을 경고합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의 자아를 창출하기 위해 그들은 애써 뭔가를 덧붙이고자 하지만 동시에 그 부가된 부속물의 선전자가 되어 가능한 많은 이들이 자기들을 닮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그들 자아의 단일성은(그토록 고생 끝에 획득한) 즉각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저는 제가 쓴 글을 전시해서 얻는 피드백에 쾌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글쓰기 모임에 참여해서 제 생각과 사고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더 굳건해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근데 세상엔 무수한 작가와 달변가가 거리마다 가득 차 있습니다. 전 거기에서 그들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나를 기껏 다 드러냈는데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목격하면 힘이 빠지는 겁니다. 그럼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서 노트북을 붙잡고 초조한 문장을 새겨 넣습니다. 강박적으로 책을 펴서 더 나은 문장을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내 고유함을 발견해내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렇게 공허한 기분이 불시에 절 습격하는 걸 피해 보려고 거듭 쓰고 또 쓰지만 비슷한 궤도를 맴돈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습니다. 저를 드러낼수록 맞부딪히는 한계가 때론 절 지치게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바닥이 드러나는 기분이 든달까요. 그게 쿤데라가 말한 단일성의 훼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꼬장꼬장한 할아버지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은 하지 말라고 콕 집어서 말해주는 것도 아니라서 답답하기만 합니다. 잔소리만 늘어놓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니 보탤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요즘 견디지 못하는 게 하나 더 있다면 혼자서 해나가는 겁니다. 전 늘 홀로 견디면서 깨쳐나가는 데 능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전 수년간 외지 생활을 하며 그런 정서에 익숙해졌고, 그걸 오히려 더 잘 활용해서 나아가는 타입이었습니다. 근데 요즘은 책상에 앉아 정적을 마주하길 겁내고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혼자라는 기본값이 지워진 느낌입니다. 누군가를 붙잡고 속사정을 털어놓고 싶은 바람이 머릿속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만남에 응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허탈함에 젖곤 합니다. 혼자서 꿋꿋이 버텨내던 인정 투쟁도 이제는 한풀 꺾여서 카톡 창을 붙들고 도움을 구하곤 합니다.
당신이 없는 시간이 앞에 창창합니다. 이제부턴 어쩌나 싶습니다. 켜켜이 쌓인 내일 걱정부터 해야죠.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가 더 심해질 텐데. 덧셈으로 쌓아놓은 숫자가 줄고, 덜어내는 게 더 익숙해질 텐데.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궁지에 몰릴 텐데, 그땐 어떻게 홀로 버텨나갈 수 있을까요. 확실하다고 믿었던 관계를 청산하고 이제 어떤 회한에 빠져 지낼까 두려워졌습니다. 더하는 삶을 우려하던 쿤데라는 <불멸>에서 빼는 삶에 관해서도 한마디 보탰어요. “아녜스는 자아의 순수한 본질로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이고 차용된 모든 것을 추려냈다. (연속적인 뺄셈에 의해 제로에 이를 위험을 무릅쓰고)” 자아의 순수한 본질은 모르겠고 이 알쏭달쏭한 문장에서 제가 건져낸 건 부재로 다가서는 태도예요. 지금은 기운이 좋아서 더하는 삶을 정력적으로 소화하겠지만, 언젠가는 뺄셈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간신히 쌓아놓은 걸 다 헐어내고 공허함을 감내해야 할 겁니다. 제 몸에 덕지덕지 붙은 선전물을 쳐내면 저의 본질이라는 게 드러날까요. 전 제 실체를 볼 자신이 없어서 이토록 괴로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 의욕적으로 올해 계획을 적다가, 밀란 쿤데라가 내민 문장에 마음이 어지러워서 이런 글을 적어봤습니다. 역시 자정은 혼돈의 시간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