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하루에 한 번 인스타그램을 켜봅니다. 손가락을 놀리며 사진을 하나씩 내려봅니다. 종종 제 사진도 하나 정도는 올립니다. 제일 잘 나온 놈으로 골라 필터까지 씌우면 이제 됐다 싶어서 업로드를 합니다. 누군가 그걸 생존신고라고 칭하더군요. 이미지 과잉의 시대라고 불평한 적도 많은데 막상 사진이 잘 나오면 저도 스스럼없이 편승해서 즐깁니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은 늘 애증을 함께 가져옵니다. 중독성이 있는 바보상자처럼 보이다가도, 누군가와 어이질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습니다. 다만 사용하는 제가 버릇처럼 온갖 자극에 휘둘리고 있다는 걸 느낄 땐 지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리워서 며칠 못가 다시 깔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손가락으로 피드를 내리다 보면 도무지 끊어내질 못합니다. 귀여운 레트리버에 몸매 좋은 미남 미녀, 여행지의 풍경과 나는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산해진미가 가득합니다. 그렇게 사진에 휘둘리다 보면 잘 시간이 한참 지나있습니다. 전 책을 사랑하지만, 곧 글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어느 학자의 말에 수긍하고 있습니다. 이미지만큼 편리한 도구는 없으니까요. 웃는 이모티콘 하나면 기분 최고라는 걸 아는데 굳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쓰다가도 친구의 톡이 오면 급한 마음에 엄지 척 이모티콘을 누르고 덮어버립니다. 그렇게 일축하면 더는 생각할 게 없어지는 겁니다. 짐짓 의연한 척해봐도 이런 생각을 하면 울적해지긴 해요. 매일 글을 쓰고 읽는 처지라 그런가 봅니다. 언어의 입지가 줄어들면 제 삶도 좁아질까 두렵습니다. 요즘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물어서 독서 모임에 나가서 떠들다 옵니다. 책 얘기를 할 생각이니 책 좋아하는 사람만 모이라는 약속을 믿고 갑니다. 시간이 더 흐르면 독서 모임이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알코올 중독자 모임처럼 아직도 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들이 신세 한탄이나 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여전히 느릿느릿 활자나 읽는 부적응자는 구하기도 힘든 종이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겠죠. 어쩌면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때 지난 레코드판처럼 고가에 사고 팔릴지도 모릅니다. 레트로풍 치장으로 눈요깃감이 되지는 않을는지 걱정이 앞서네요.
저는 글로 서술할 수 없는 세상은 가상에 불과합니다. 전 국민이 사진작가라서 그런지 SNS에는 사진이 끝도 없이 올라오지만, 제겐 그게 다 허구로 느껴집니다. 간혹 논란이 되는 사진이 온 사회를 뒤집어 놓는 걸 보는 것도 두렵습니다. 사진 한 장으로 무수한 억측을 만들어 내는 기사를 보면 섬뜩해지죠. 다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채 거친 말투로 공격을 감행합니다. 사진은 그만큼 사실 그대로의 팩트로 여겨지지만, 프레이밍 과정에서 뭔가 놓치고 맙니다. 작가 수전 손택은 자신의 책 <타인의 고통>에서 사진은 제한된 사실일 뿐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사진엔 우선 맥락이 잘려있어서 사실을 호도하는 거짓 헤드라인과 다를 게 없다고 말합니다. 사진이 샷(shot)을 통한 프레이밍으로 피사체를 조정할 때 수많은 정보는 소실되기 마련입니다. 대중은 사진을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지만, 언론은 이를 이용하여 오직 제한된 정보만 제공하죠. 그만큼 사진은 왜곡이 쉬운 매체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SNS 속 그가 현실과 같은 모습일 거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진은 조작이 쉬워져서 실물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화면 속의 가짜의 나와는 다른 민낯의 진짜 내가 있다는 말이 주는 두려움에 관해 생각합니다. 사진으로 모든 걸 다 안다는 식의 선동적인 주장을 더는 듣기 어려워졌습니다.
사진작가 ‘케빈 카터’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는 저널리즘 윤리를 말할 때 주로 인용되는 작품입니다. 독수리가 굶주린 흑인 소녀를 노려보는 이 사진은 작가에게 퓰리처상을 안겼지만, 알려진 대로 작가는 대중의 심판대에 올라 얼마 못 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진은 수단이라는 작은 나라의 실태를 국제 여론에 환기했고, 더 나아가 아프리카 식량난을 알리는 데까지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비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진의 진실은 뭘까요. 과연 우리는 사진 한 컷을 보고 얼마만큼 알 수 있을까요. 수전 손택은 책에 사진 자체가 아닌 상상의 중요성을 강변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는 것, 곧 죽을 이름 모를 아이가 겪는 고통이 나와 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상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내가 누리는 특권이 굶주린 아이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장에서 어떤 절박한 호소가 들립니다. 수전 손택은 같은 책에서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이런 사진들이 자아낸 연민과 메스꺼움으로 마음이 심란해진 나머지, 그밖에 다른 어떤 사진들이 당신에게 보이지 않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그밖에 어떤 잔악 행위들과 어떤 주검들을 보지 못하는지 물어보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수전 손택이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저서 <3기니>를 책에 인용한 부분에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 반전주의 기자가 버지니아에게 '우리'가 세계대전 발발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하는가를 묻자, 그녀는 단호하게 이 '우리'라고 주어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당신은 나와 우리로 묶일 수 없다. 지금 인류의 비극이 남성성에 의해 발발하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과 같은 테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이 테두리 밖에 밀쳐진 타자는 어쩔 셈인가." 편의적인 구분에 저항하고 서로의 입장이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걸 인식할 때 속 편한 보신주의를 깨뜨릴 수 있을 거라는 작가의 말에서 서로의 사정이 다른 사람들이 묶인 이 공동체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저도 종종 생각합니다. 제가 타인과 비교해서 주체성이 생기는 지점은 어디일지 사실 잘 모르겠거든요. 전 몸이 아플 때 육신의 도드라짐을 느낍니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매만질 때 저는 감각이 숨 쉬고 있다는 걸 체감하는 겁니다. 제 존재가 통증으로 수반하며 육체를 현현하게 만들어줘요. 고통이 극심해져 참기 어려울 땐 제가 느끼는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왜 신은 제게 이런 고통을 내릴까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아플 때는 그만큼 고통이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당신의 사정이니 내 아픔이 아니거든요. 저는 제 고통을 주로 글에 적지만, 그걸 독자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생각합니다. 공감이라는 것이 한낱 문장으로 다다를 수 없다는 무력감도 느낍니다.
인류가 처음 그림을 그릴 때 그 대상이 종교화였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순교를 상징하는 성서의 잔혹한 이미지는 본능적인 이끌림이 있었을 겁니다. 성자는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여 체화한 인간이잖아요. 보통 사람의 평범한 죽음보다는 신성한 죽음이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질 수 있었던 것도 그 이타성에 있을 겁니다. 그만큼 인류는 누군가와 공감할 수 있는 궁극을 바랐지만 그건 예술에서만 실현되는 가상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고통에 의미를 찾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서로의 통증이 못지않음을 외면하는 순간 전쟁은 시작된다. 종교가 대의를 위해 무수한 이를 죽인 것처럼, 전쟁이 선의라는 허울에 속아 어처구니없는 계기로 시작했다는 걸 기억하라. 우리라고 칭하는 순간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이를 돌아보라." 결국 결론은 같습니다. 프레임 밖을 보려는 노력이 없이는 전쟁을 막을 수 없습니다.
브라질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두’(Sebastião Salgado, 1944~)의 사진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가 찍은 제삼 세계를 사진으로 보면 매혹 그 자체로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살가두의 시점 안에 선 사람은 근사한 이미지로 박제되어 있습니다. 대상화된 피사체는 우리에게 더는 다가오지 못하죠. 누군가의 고통을 미적 대상으로 치부한다는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벌거벗은 아이는 살가두를 통해 예술이 되었지만, 과연 그 사진 속에 개인이 실존하는가 자문하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어요.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고통이 폄하되길 원치 않지만, 타인의 고통을 아름답게 연출한 사진 앞에선 관대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예술의 아름다움이 누군가의 고통을 쉬이 덮는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민 하나 던져주고는 쉬이 다음 페이지로 넘긴달까요. 그렇다고 피를 흘리는 아이를 그려내야만 공감이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고통을 범주화하는 게 가장 무서운 일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말합니다. 내가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은 쉽게 대상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치부하게 만듭니다.
수전 손택이 책에 실은 ‘제프 월’의 사진 <죽은 군대는 말한다>(1922)도 마찬가지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아프가니스탄 모로코 근처에서 사살된 소련군을 연출한 작품입니다. 사진을 보다 보면 이 사진이 왠지 모르게 기이하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작품에 관해 수전 손택은 이렇게 적었어요.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 사실관계가 거세된 사진은 아무런 의미 없이 떠돌아다녔습니다. 우리가 다가서지 못한 그들 하나하나에는 오직 시간의 귀퉁이를 부유했던 그림자만 남아있었습니다. 박제된 이미지는 무력하고 처연한 기분을 불러옵니다. 시간이 소실한 맥락은 사라지고 오직 시체만 즐비한 꼴입니다. 죽은 군대는 죽은 사람을 말하지 않고 오직 폐허의 전장이라는 이미지 하나만 달랑 남았습니다.
수전 손택은 유럽 몇몇 국가를 비롯한 이른바 강대국이 제삼 세계의 참상을 방관하는 태도에 분노를 표해왔습니다. 이른 아침 매끈한 셔츠를 입고 조간신문을 펼친 남자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전해진 비극에 혀를 차지만 두 시간 후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햇볕을 즐길 것입니다. 내 삶과 무관하게 보이는 타자의 고통은 나도 어쩔 수도 없으니 덮어버리는 겁니다. 기껏 한다는 게 국제사회 공조 시스템을 운운하며 유엔의 무능함을 지적할 테지만, 어디까지나 말을 돌리는 짓에 불과합니다. 고통받는 이를 타자화 시키는 순간 마음은 편해지니까 넘어가기 쉬은 원리입니다.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불쌍한 그들을 동정하지만, 그걸 실세계의 비극으로 인식하진 못하는 건 이 도시의 고질병과 같습니다. 어쩌면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그들의 처지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지식인은 회의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전 손택은 글 곳곳에서 지난날 자신이 굳건하게 주장했던 생각을 고쳐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사고의 연쇄작용에 따라 주관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학자였습니다. 탁월한 평론가이자 기자였으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살았던 손택이 왜 지금까지 높은 명성을 가졌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상대를 설득하는 글쓰기란 뭘까요. 풍부한 사유의 지층엔 여러 겹의 숙고가 있을 테지만, 제가 보기에 수전 손택은 복잡하게 돌려 말하기보다는 우선 행동하기를 촉구하는 행동주의자로 느껴졌습니다. 선의로 가득 찬 눈빛을 모른 척하기란 어려운 일이니, 그는 우선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건 저 같은 방구석 독자에겐 퍽 감동적인 태도라서 일시적이지만 가슴에 불길이 일기도 했습니다. 쉽지 않은 독서였지만 제 속 어딘가에 자라고 있었던 공포와 혐오, 광기와 연민을 낱낱이 까발리는 기분에 시원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수전은 안온한 문학에서 품위를 지키며 살던 저를 폐허에 휩싸인 감정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스펙터클에 정신이 번쩍 들게 했죠. 결국 문학이란 타인의 고통을 체험하는 행위가 분명합니다. 진부한 말이지만 전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재차 숙고하여 고통에 다가서야 한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제 독서가 절대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지친 퇴근길에 놓쳐버린 무언가를 뒤늦게라도 짚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