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혼자 있을 때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by 박민진

요즘처럼 고달플 땐 거시의 세계를 떠올려 보곤 합니다. 인류 역사나 우주의 원리를 다룬 작품을 읽는 식이죠. 그러다가 졸리면 자고 다시 일어나서 읽다 보면 막연하게 괜찮다는 기분이 듭니다.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에 비하면 제 고통은 얼마나 미약하고 하찮은지 생각합니다. 제가 천착한 아픔도 엔트로피의 증거로 어느 순간부터는 산산이 흩어질 테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무질서한 놀이의 세계를 거닐면서 무아의 상태로 빠지는 그런 광경을 그려봅니다. 어렸을 적 스타크래프트를 하면서 밤을 지새운 것처럼 우주 공간에서 놀다 보면 제 고민거리는 한갓진 일로 보입니다. 그렇게 고통이 작아지면 지끈거리는 속상함도 허투루 치부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떤 때는 제가 부대끼고 몸서리치는 실연의 아픔이 소갈머리 협소한 소인배의 특질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손톱 좀 바짝 깎았다고 새된 고함을 치는 아이처럼 미숙한 감정으로 치부해버립니다. 도통 이불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제 모습은 가까이서 봐도 멀리서 봐도 우습기만 합니다. 한 마디로 롱 쇼트와 클로즈업을 동시에 쓰면서 버텨나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헤어진 연인에 목매서 목이 메어 밥도 잘 못 먹는 이런 못 볼 꼴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수만 점 부끄럽기 때문이에요. 전 두꺼운 책에 머리를 파묻고 시간을 견뎌내고 있을 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문장에 집중하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에 벌어진 공간에 번번이 빠지곤 합니다. 보폭을 넓게 해서 뛰어봐도 매번 고꾸라져요. 그러면 책을 집어던지고 넷플릭스를 켜고 <소프라노스>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낄낄거립니다. 나이 든 마피아 두목이 정신과 상담을 받는 얘기인데 남 얘기 같지 않아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이렇게 거시와 미시를 오가면서 내 사이즈를 체감하면서 정상 궤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점차 마음이 온순해지는 게 느껴져요. 오늘 방에 혼자 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잊지 못할 기억이 있어요. 눈을 뜨자마자 TV 소리가 들렸고, 여느 때라면 엄마의 온갖 구박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을 제가 그날만큼은 거실에 드리운 의미심장함에 놀라 이불에서 기어 나왔어요. 화면에는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처박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TV를 주시한 채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을 주시했습니다. 전 졸린 눈으로 그 장면이 꼭 영화 같다고 했고, 형은 아무 말 없이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말 없이 보며 쌀밥을 씹었습니다. 사람이 블록버스터 영화를 즐기는 건 지구가 가루가 되는 순간에 푹신한 소파에 앉아있는 자신의 안전함을 확인하는 쾌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인류 전체가 몰살당하는데 난 감자 칩이나 먹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광경이 그려집니다.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현실 세계의 특권을 맘껏 누리는 겁니다. 뉴욕의 시가지가 잿더미에 휩싸일 때 전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마블 영화를 보는 스펙터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건 몸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르르 떨면서 다시 안전한 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갔거든요. 더 확실한 건 비행기 속에서 죽어갔을 승객들을 떠올리진 못했다는 겁니다. 두 동강 나는 건물과 폭발의 스펙터클이 누군가의 비명을 앗아갔습니다. 그 압도적인 이미지에 취한 저는 누군가의 삶, 인생, 일상, 관계들이 다 먹먹한 연기로 증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없었습니다. 전 그날도 평소처럼 세수하고 어머니의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고 등교했습니다. 불과 몇 해 전 수많은 아이가 목숨을 잃었을 때도 전 눈물을 흘리지 못했습니다. 어느 앵커가 울컥해서 말을 잇지 못할 때도 멀뚱히 팔짱을 끼고 되새김질하듯 쌀밥을 씹었어요. 고통받는 그들과 엄연히 분리된 전 화면 귀퉁이에 보이는 수치로 환산된 고통을 헤아렸습니다. 희생자 수가 카운트될 때마다 다리를 떠는 속도가 올라갔고, 오늘 하루 수습할 일을 생각하느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사무실 창으로 화창한 햇볕이 들이쳤고, 분주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역 앞에 잔뜩 모여 있었어요. 목숨을 잃은 무수한 아이들과 달리 사람들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었습니다. 방에 혼자 있을 때 그런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작가 프란츠 카프카가 약혼녀에게 보낸 연애편지 중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언젠가 내가 글을 쓸 때 옆에 앉아 있고 싶다고 말했죠. 내 말 잘 들어요, 그러면 나는 전혀 쓸 수가 없어요. 글쓰기란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낸다는 뜻이에요. 그 궁극의 자기표현과 투항, 그 순간에 한 인간이 다른 사람과 관계한다면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끼고 따라서 제정신인 한 언제나 그런 일에서 움츠러들게 돼요. 바로 그래서 글을 쓸 때는 결코 충분히 혼자일 수도 없고, 글을 쓸 때는 결코 충분히 고요할 수도 없고, 심지어 밤조차 충분히 밤이 아닌 거예요.” 카프카는 연인에게 왜 떨어지라고 경고하는 모진 편지를 썼을까요. 자신의 창작에 방해되니 좀 내버려 두라고 밀어내는 꼴입니다. 카프카는 약혼녀를 사랑했지만,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 혼자가 되려고 도망쳤습니다. 그는 세 번 약혼했다가 세 번 모두 파혼한 사람입니다. 카프카의 저서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엔 이런 구절도 있어요. "나는 너와 헤어질 수 없지만, 같이 살 수도 없다." 카프카가 약혼녀에게 남긴 이 문장은 그의 소설처럼 부조리하죠. 카프카는 사랑하는 여인과 만났을 때 결혼을 결심하지만, 식이 코앞에 다가올 때쯤 다 망쳐버렸습니다. 카프카는 사랑에 속수무책이었지만 이별에서는 더 서툴고 모진 사람이었죠. 카프카의 복잡한 속내는 이제 문학 수사로 자리 잡은 ‘카프카적’(Kafkaesque)이라는 용사를 짐작게 해요. 카프카에게 필요했던 건 고요한 책상이었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사랑하는 여인의 어깨였을까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려고 했던 건 상대를 기만하는 짓이었을까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은 애틋한 일이지만, 그런 시간을 지속하면 가슴을 짓누르는 때가 오곤 합니다. 외로움에 치를 떠는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 혼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나는 밤이 찾아옵니다. 곁에서 쌔근쌔근 누워 잠을 자는 그가 점점 더 두려워지고,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면서 불안해지는 겁니다. 전 지금 혼자가 돼서야 당신에게 품었던 의심과 불안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당신을 향한 거대한 사랑 안에 거할 땐 보이지 않았던 아늑함을 그리곤 합니다. 제게 닥친 재난상황을 더는 뒷짐을 지고 구경할 수가 없습니다. 타인의 속사정이 아니라 제 사정이라서 결여를 숨긴 표정과 억누르는 시간이 모두 고통입니다. 절 빤히 보는 눈을 모른 척하며 아파트를 빠져나갔던 길이 떠오릅니다. 절정의 날씨였지만 지독하게 권태로웠던 저는 연이어 도착하는 당신의 메시지를 무시했습니다. 요즘 방에 혼자 있을 때 그때를 떠올리곤 합니다.


작가 ‘이언 매큐언’은 <속죄>의 작가의 말에서 9. 11. 테러에 관해 이런 말을 적었습니다. “비행기 납치범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승객의 생각과 느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을 계획했더라도 끝까지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나치게 순진해 보이는 이 문장은 제게 그 자체로 문학입니다.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의 속내를 파고들어서 사정을 헤아리는 일. 전 이제 대답 없는 당신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제 고통에만 골몰했던 시간을 지나 당신과 제가 함께할 때 당신이 가졌을 고통을 하나씩 곱씹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라는 사람에 빙의해서 글을 쓰고, 당신이 느꼈을 고통을 픽션의 영역에 녹여내고 있습니다. 그건 모조품에 불과하지만 어쩔 땐 살아있는 듯 펄떡거립니다. 있지도 않은 감정을 그럴싸하게 꾸며낸 것에 불과하지만 가끔은 추억보다 더 애틋한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거기엔 제가 미처 보지 못했던 당신의 방이 있습니다. 고독의 형태랄지, 빛이 드리우는 각도와 같이 미세한 것까지 다 글로 써보려고 합니다. 비록 가상의 공간이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당신의 소지품을 책상에 올려놓고, 당신이 입던 옷을 옷장에 걸어놓으면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방에 혼자 있을 때 전 종종 이런 상상을 합니다.


우린 손을 잡고 걷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신호등에서 끌어안다가 다시 부지런히 걷는 느낌이 떠오릅니다. 집에서 일찍 나서 커피를 마시러 나갈 때도 생각납니다.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하나도 궁금하지 않고 그렇다고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만 골라하는 당신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그 순간을 절대 잊고 싶지 않았았습니다. 그때 당신 눈의 생김새와 마른 몸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완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린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원한 바람에 떠밀리듯 골목골목 사이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자그마한 커피집에서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우린 다시 큰길로 나가서 버스 정류장에 섰습니다. 차가 올 때까지 어깨를 맞대고 기다리다가 당신이 버스에 오를 때면 난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당신은 맨 뒷자리에 앉았고 버스가 떠나서도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로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는 저를 확인했습니다. 버스가 코너를 돌아 완벽히 사라져 버릴 때까지 전 떠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손을 흔드는 당신을 기억했습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그렇게까지 오래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방에 혼자 있을 때 부끄럽게도 이런 글을 적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