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잘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받은 편지라 마음이 약간 설레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당신에게 이렇게 편지를 받다니, 돌이켜 보니 이 정도 장문의 편지는 참 오랜만이네요. 다시 편지를 받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오늘 사무실 책상에서 당신의 메일을 읽는데 답신을 적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답이 없는 보고서를 쓰는 중이었는데 빨리 뭔가를 적어보고 싶어 섣부르게 구두점을 찍고 백지를 마주했습니다. 편지가 편지에 그치지 않고 제게 뭔가를 질문해줘서 고맙게 여깁니다.
당신이 "요즘 사람을 만날 때 더 외로움을 느끼고, 마음이 벗겨지는 기분이 든다"라고 적은 대목을 한 번 더 읽어보았습니다. 요즘 날씨처럼 쓸쓸할 때라면 응당 그러리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 외로움에 저도 슬쩍 편승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신이 물어준 제 외로움에 관해 사양하지 않고 써보려고 합니다.
저는 요즘 사무실에서 편치 않습니다. 퇴근하고는 뭐든 하겠는데, 업무 시간에는 일을 하다가도 동료들의 웃음소리가 남 일처럼 들립니다. 정말 일만 딱 하고 주차장으로 갑니다. 나를 배제한 웃음이라 더 구석으로 몰리는 기분입니다. 나를 부러 배제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선뜻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입니다. 그들이 저를 따돌리는 게 아니라 제가 스스로 고립되면서도 그걸 애석하게 느낍니다. 저는 혼자라는 걸 자랑처럼 내세우는, 그런 제목의 책까지 써서 낼만큼 고독을 좋아했습니다. 남과 부대껴서 그 안에서 힘을 얻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항시 공들인 문장으로 제1인분의 삶을 멋들어지게 적었습니다. 공깃밥은 두 그릇씩 먹어도 삶에서는 저 하나면 족하다고 적었습니다.
친구들이 다 결혼하고 가족을 하나둘 늘려가도 초조하지 않았습니다. 형은 제게 너도 때가 되면 가족을 꾸릴 거라고 말했지만, 저는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가정을 꾸린다는 것을 마치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라도 된다는 듯 말하는 게 영 못마땅했습니다. 전 그들의 선의 어린 충고가 영 미덥지 못했습니다. 마치 답은 정해져 있는데 제가 오기를 부린다는 식이었거든요. 인생을 마치 정사각형으로만 보는 것 같아서 시시해 보였습니다. 제가 보기엔 인생은 다면체에 가까워 이리저리 굴려봐야 아는데 그들은 게으르게 똑같은 답만 하는 꼴이었습니다. 타인의 삶을 폄하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그런 속내를 품어왔음을 실토합니다. 지금도 생각이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게 기질과 두개골이라고 하죠. 하지만 요즘엔 두개골은 멀쩡한데 기질에 미세한 균열을 느낍니다. 생활 전반이 바뀌면서 마음이 뒤숭숭합니다. 하는 일, 보는 골목, 걷는 공기까지 뭐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불과 두어 달 전이었다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한심한 소리에도 신경을 씁니다. 우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아지질 않습니다. 아마 더 부딪치고 짓이겨져야 하나 봅니다.
전과 같은 호기가 사라졌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든지 나 혼자 카페 한구석에 앉아 노트북만 펼 수 있다면 뭐든 괜찮다고 믿었는데 요즘은 속이 컴컴해서 창밖만 보다 옵니다. 헬스장에 가도 명치 부근에 자리한 무거운 응어리가 몸을 늘어지게 합니다. 뭐든 찧고 까불며 그럭저럭하던 게 요즘에는 힘에 부칩니다. 공허하기도 허탈하기도 해서 넋을 놓고 나약한 소리를 합니다.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굴던 건방진 기분이 그립기까지 합니다. 남에게 이런 죽는소리를 하진 못합니다. 자존심이 쌔서 얼어 죽어도 센 척하는 게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친구는 제 안색을 살피고 상담을 받아보라고 하지만 아직 거기까진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다 내치고 떨치고 나간다는 문장을 책에 적은 게 엊그제 같은데 당신을 향한 미련을 한아름 껴안고서 뭐 하나 내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건 마치 '혼자'를 기본값으로 세팅해놨는데, 검은 옷을 입은 낯선 누군가가 들어와서 값을 제멋대로 넣고 사라진 기분입니다.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멱살을 잡고 메다꽂을 생각입니다.
저는 이제 환상을 잃고 현실이 일상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는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과 재회하는 날을 떠올리며 상상에 젖긴 하지만 그것도 계단을 다 오르면 그걸로 끝입니다. 다시 잘해 볼 가능성을 일축하고 마음의 열기가 식어감을 느낍니다. 그게 무척이나 안타깝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걸 압니다. 그는 제게 특별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평범한 존재가 되어갑니다. 그도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가끔 하던 통화도 끊기고, 이제는 서로 귀찮은 존재가 되어갑니다. 아쉽지만 그게 현실이고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리려는 안간힘은 달뜬 연애편지처럼 낭만적이지만, 모든 걸 돌려낼 수 없다는 실감은 그야말로 서글프기만 합니다. 사랑을 얻기 위한 편지가 아니라 다시 제자리를 찾으려는 안간힘이라 힘에 부칩니다. 다행히 저를 돌봐주는 눈길이 느껴집니다. 아닌 척하지만 안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빨리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뻔뻔한 생존을 위한 악착으로 봐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늘 그런 힘을 동경해왔고 저는 오늘도 다짐 같은 문장을 적으면서 더 나은 새벽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사실 이런 죽는소리를 글에 쓴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지만, 오직 당신이 제게 뭔가를 물어봐 줬기에 이 정도 적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가능한 한 솔직하게 썼습니다. 솔직함으로 가장한 맹랑함이 조금 부끄럽습니다. 참을성 없는 문장을 적는 저를 부디 너무 한심하게 여기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날씨는 정말 좋았습니다. 퇴근길 차 안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평온함을 넘어서 무시무시한 체념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떤 말을 뱉어도 미동도 없을 거라는 묵묵한 결기가 느껴졌습니다. 가방 속에 있는 단단한 책을 어루만지면서 흘러간 노래를 들었습니다. 결코 평안한 나날을 보내지 못할, 예사롭지 못한 생각들을 글로 적고 있을 당신도 비슷한 하늘을 보며 편지를 썼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저 있는 그대로의 제 기분을 적은, 아마도 꽤 일방적인 토로에 가까운 이 편지가 당신의 복잡한 시간과 적게나마 공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긴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