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테 안경
오늘 <금테 안경>을 다 읽었습니다. 여름에 가기 전에 읽어서 다행이에요. 지난여름에 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생각도 나고, 이탈리아 여행 기억도 떠오릅니다.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 물에 비친 햇빛과 우거진 녹음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금테 안경>의 배경인 볼로냐는 가본 적도 없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카페에서 누군가의 속사정을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볼로냐라는 도시에 관해 아는 거라곤 볼로네즈 소스로 만든 라구 스파게티뿐이지만, 작가 조르조 바사니의 세밀한 문장 덕에 낯선 시공간을 내 것처럼 상상해낼 수 있었습니다. 스타벅스에 소설을 들고 가서 이왕이면 에스프레소를 시켰고,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오뚜기 스파게티 소스에 라면 사리를 넣어 먹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에 엄마가 해줬던 스파게티도 따지고 보면 다 볼로냐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토마토에 고기를 잘게 썰어 넣은 그 붉은 소스가 기억납니다. 검색해보니 볼로냐에는 미식가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식도락이 삶의 중심인 사람들이 작은 식당에 모여서 파스타를 실컷 먹는 광경을 떠오릅니다. 흰옷을 입은 배불뚝이 요리사가 소스를 젓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나요. <금테 안경>의 주인공 파디가티 선생도 넉넉한 체형으로 그려집니다. 파디가티 선생은 모르긴 몰라도 퇴근하고 혼자 집에서 상당량의 파스타를 먹으면서 쓸쓸한 허기를 달랠 겁니다.
전 이탈리아 북부 여행을 할 때 볼로냐를 그냥 지나쳤습니다. 유레일 기차가 볼로냐 역에 섰는데도 눈을 감고 있었거든요. 전날 밀라노에서 밤늦게까지 놀았더니 두통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두 시간만 더 가면 베네치아에 도착하니까 볼로냐는 그냥 무시한 것입니다. 당시 제가 읽던 론리플래닛 책자에는 볼로냐에서 유명한 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볼로냐 대학뿐이었습니다. 어차피 유레일 패스를 끊은 상태라서 그냥 내려서 시내 한 바퀴 돌고 스파게티 한 그릇 먹을 만도 한데 골치가 아파서 그만뒀습니다. 전 그렇게 손바닥 차양 사이로 미간을 찌푸리며 그렇게 작가 ‘조르조 바사니’의 도시를 지나쳤습니다. 지금 <금테 안경>을 읽은 저로서는 두고두고 후회할만한 일입니다. 볼로냐에서 기차로 20분 거리에 <금테안경>의 주 무대인 작은 마을 페라라가 나오거든요. 조르조 바사니는 볼로냐 대학 문학부 출신이고, 성년이 되기까지는 페라라에서 자랐습니다. 그만큼 그의 문학적 토양은 볼로냐와 페라라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봐도 무방한 겁니다. 구글 검색창으로 보니 두 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은 마을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구글맵에서 로드뷰를 보는 일뿐입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노트북에 페라라 사진을 띄워뒀더니 페라라 지도가 머릿속에 다 그려졌습니다. 어쩌면 조르조 바사니의 문장은 섬세하고 예리해서 오히려 직접 여행을 하는 것보다 더 페라라를 잘 묘사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마 앞으로 볼로냐라는 지명이 나오면 무조건 <금테 안경>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최근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조르조 바사니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선집이 나왔습니다. 조르조 바사니는 현재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불리는데 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사실 이탈리아 문학 자체가 제겐 낯설게 느껴집니다. 제가 아는 이탈리아 작가라곤 이탈로 칼비노, 알베르토 모라비아 정도였거든요. 기껏해야 학자에 가까운 작가 움베르토 에코랑 최근 유럽 전역에 돌풍을 일으킨 엘레나 페란테 정도가 제겐 이태리 문학의 전부입니다. 조르조 바사니를 뒤늦게라도 알 수 있었던 건 황정은 작가가 어느 행사에서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인연이 없었던 조르조 바사니의 책은 그렇게 여러 우연이 겹치면서 제게 찾아왔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제가 이탈리아라를 막연하게 좋아한다는 겁니다. 날씨 좋고 커피를 달고 살며 늘 낙천적이고 태평한 그들 사이에 끼어 살고 싶습니다.
소설 <금테 안경>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외로운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엾은 남자 아토스 파디가티. 이 늙수그레한 남자는 잘 나가는 의사인 데다가 문화적 소양도 뛰어나고 유머가 넘쳐서 마을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합니다. 옷도 화려하게 입고 말투는 어찌나 상냥한지 온 동네 사람들이 그를 보려고 병원을 찾을 정도입니다. 그는 어디 가든 품위를 지킬 줄 아는 지식인이라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합니다. 무엇보다 작은 마을 의사는 모두와 친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그에게 진료를 받으러 가지 않은 이가 없으니까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다들 직감적으로 파디가티가 게이라는 건 알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게이라고 특정하진 않았을지 몰라도, 그에게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도 쉬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을에 꼭 필요한 사람이거든요. 단지, 학력과 인품이 우월한 그의 반듯함이 추문을 잠재웠을 뿐입니다. 시골 사람들은 마을 사람 하나하나에 관심이 많고,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작고 화목한 공동체일수록 사생활을 보장받기가 더 어려운 법이니까요. 요즘엔 의식이 많이 나아졌다 해도 민족주의의 탈을 쓴 집단 문화는 인류의 뿌리 깊은 내력과 같습니다. 그리고 시기가 딱 파시즘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는 시점이어서 성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받기란 더 어려웠던 겁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파디가티는 사람들 눈을 피해 저녁 시간마다 조용히 영화관을 들락거렸습니다. 최대한 자신에 관한 말이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혼자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마을에서 제 나름대로 눈치 보며 살아온 것입니다. 금테 안경을 쓰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자리에 앉아 영화를 관람하는 파디가티는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은거하며 살았습니다. 은막의 세계는 이 좁디좁은 마을에서 그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숨통이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혼자 영화를 보는 파티가티에 대해 수군거렸습니다. 평생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듯 살아온 파디가티는 그럴수록 더 조용해졌습니다. 제 눈엔 그가 시대를 잘못 태어난 보헤미안처럼 보였습니다. 패션 감각이나 예술에 대한 풍부한 소양, 고급스러운 말투까지 그는 마을에 섞이기에는 너무 눈에 띄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파디가티는 꽤 오랜 기간 우정과 사랑을 기대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주민들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닌 파디가티는 알았지만,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파디가티는 몰랐습니다. 이방인을 향한 경계심은 지워지지 않았고, 자신들과는 다른 파디가티에게 뭔지 모를 열등감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모든 비극은 파디가티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그의 고독이 집을 기어 나와서 평범한 사람들에 닿는 순간 그는 망가졌습니다.
우연히 기차에서 대학생들과 어울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가 어렸을 적부터 진료를 봐온 마을 애들이라 파디가티는 별생각 없이 친근감을 표시했습니다. 파디가티는 마을 애들이 그의 성 정체성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딱 그맘때의 더벅머리 아이들이 얼마나 악의적으로 상대를 약점을 후벼낼 수 있는지 더 몰랐을 겁니다. 순수하다는 말 뒤에 숨어서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그는 상상도 못 했겠죠. 조르조 바사니는 화자를 포함한 마을 아이들이 파디가티에게 갖는 호기심 이면에 내재한 폭력성을 묘사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입니다. 학생들의 에두르지 않는 질문이 그를 파괴하는 과정을 신랄하게 묘사합니다. 위선보다 위악이 더 날카롭다는 걸 전혀 모르는 순진한 아이들은 파디가티가 원치 않았던 아우팅을 해버리며 그를 옥죕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무구한 표정으로 딴청을 피워요. 학생들은 비밀이 지켜지는 순간까지는 파디가티를 존경했지만, 그가 게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드러나자 본격적으로 파디가티를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악역에 가까운 델릴리에르스는 앞장서서 파디가티를 깎아내립니다. 재밌는 건 델릴리에르스 역시 게이라는 사실이에요. 자신이 게이라는 걸 들키기 싫어서 더 악랄하게 파디가티를 놀렸던 것입니다. 전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파디가티의 얼굴을 봐야만 했습니다.
소설은 챕터마다 페라라의 목가적인 풍경을 손에 잡힐 듯 그려냅니다. 소박한 도시가 지닌 냄새를 고스란히 보존해낸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절실한 외로움도 그 안에 녹아있습니다. 제겐 마치 지독한 외로움이야말로 삶의 한 조각이 아니겠냐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조르조 바사니는 역사의 거시적인 흐름에 내 처진 한 개인의 추락을 보여줍니다. 세계를 둘러싼 추악한 권력 앞에서 모든 아름다움이란 찰나에 불과하다는 걸 독자에게 일러주고 싶었던 걸까요. 곧 시작될 세계대전과 인종학살의 예고편처럼 파디가티가 무너지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작가가 파디가티를 바라보는 애처로운 시선, 파디가티의 밝은 표정에 가려진 어두침침한 고독, 늘 마음 한구석이 위축되어 속내를 터놓지 못하는 외로운 남자의 처지를 연년세세 변하지 않는 자연경관과 어우르며 이 모든 일이 인간의 역사라는 걸 명시합니다.
제가 <금테 안경>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지점은 파디가티가 화자와 진득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화자는 파디가티를 멀찍이서 관찰하다가 대화를 나누는 챕터에 이르러서야 그를 직접 마주합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화자도 유대인으로서 곧 무솔리니의 정부에 의해 잡혀 들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점입니다. 늘 이방인으로 소외당했던 파디가티와 화자의 입장이 별 다를 게 없어진 겁니다. 파디가티의 운명에 다소 무심했던 화자는 이제 그와 절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처지에 몰린 셈이죠. 사람이 참 우습고 가여운 순간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비루함에 대해 이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도 드물 겁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당신과의 밤을 떠올렸습니다.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누던 그 작은 방이 생각났습니다. 같이 얘기만 해도 뭔가 나아지는 그런 시간이었죠. 매일 밤 같은 시간에 어둑한 침대에 누워 얘기를 나눴는데 질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제 옆엔 몇 권의 책이 놓여있었고, 당신은 그날 있었던 일을 다 말해줬습니다. 마음이 다쳤던 순간을 꺼내놓고, 무례한 녀석들을 욕하면서 우린 힘을 얻었습니다. 우린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고, 내일은 더 나아질 거라는 위로가 통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에 당신은 극단적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전 그걸 들으면서 더 큰 과장으로 화답했습니다. 특히 고고한 지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같은 걸 가지면서도, 인터넷 문화가 생래적으로 지닌 천박한 구석을 편견 없이 즐기는 당신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전 당신이 열변을 토할 때마다 계속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마 파디가티도 짧은 시간이지만 자신과 비슷한 부류인 화자를 만나서 오래간만에 진솔한 대화를 나눈 것 같았습니다.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한결 나아지기도 하니까요.
1938년의 페라라는 유대인 밀집 지역으로 유명했습니다. 소설은 인종법이 시행되기 직전까지의 페라라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비극이 시작되기 전에 남겨진 파디가티는 끝내 버텨내지 못하고 목숨을 끊습니다. 다른 유대인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치의 만행으로 역사에 비극으로 남겨집니다. 인종과 젠더에 관한 논의는 최근 사회정서와도 멀지 않은 얘기입니다. 그래서 <금테안경>이 그리는 이야기는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파디가티가 게이라서 무심하게 그를 대했던 화자는 자신이 유대인이라서 사회에서 축출될 위기에 놓이자 그제야 파디가티에 관한 기억 하나하나를 글로 풀어 넣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살만할 땐 보이지 않던 게 누군가가 피를 철철 흘리고서야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염치없지만 그게 인간인가 봅니다.
파디가티는 자신을 게이라고 모욕했던 델르리에르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어떻게 자신을 경멸했던 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어떤 일을 겪고 어떤 마음으로 사랑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파디가티가 왜 그 못돼먹은 아이를 돈까지 줘가면서 만났는지 답답하기만 하죠. 파디가티는 어쩌면 타의에 의한 폭력적인 아웃팅이었지만 자신의 정체를 다 드러내 놓고 하는 사랑에 빠지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손가락질을 당해도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인지도요. 그래서 더 요란하게 델릴리에르스와 연애를 하며 평생 숨기기에 급급했던 자신을 보란 듯이 전시하고 싶었을까요. 누가 어떤 비난을 하든 버텨내서 살아낼 수 있다면 숨어 지내던 삶이 나아질 거라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네 모릅니다. 파디가티는 평생 숨기기에 급급했던 처지를 벗어나서 마음과 몸이 가는 대로 펼쳐낼 수 있었던 곳은 예술과 죽음뿐이었습니다. 아니 그냥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밖에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가끔 회까닥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새벽 시간에 유독 취약합니다. 뭐에 사로잡혔는지 불안해서 잠들지 못하고, 새벽에 수십 통 전화를 걸고 애원하는 제 모습을 떠올리면 끔찍합니다. 저는 밤만 되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 졸랐고, 당신은 정신없이 택시를 타고 저를 찾아와 줬습니다. 제 죽는소리를 모른 척하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왔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요즘 만나는 사람에 관해 물어보며 시기하고 질투하며 괴로워했지만 오직 당신이 제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집착 없이 어떤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살면서 겪는 모든 갈등의 기저엔 외로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외로움을 불러들이면서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알싸한 기분에 취하면 글이 잘 나옵니다. 전 그래서 종종 당신의 과단성을 부러워했습니다. 오해랄 것도 없이 딱 잘라내고 보란 듯이 잘 사는 당신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저는 오늘도 어쩔 수 없어서 <금테 안경>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당신이 읽고 울었던 이야기예요. 아침마다 먹을 걸 챙겨주고, 병원을 예약해주고 간지러운 등을 긁어주던 당신이 떠오릅니다. 저보다 먼저 제 피로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당신뿐이었어요.